예루살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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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의 이유

그랄~~` 2013. 7. 4. 14:58

(엡 1:3-14, 시 69:26-36, 벧전 2:9)

지금 우리가 주일낮 시간에는 ‘은혜의 방도로 주신 신행들’이라는 큰 제목 하에 예배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기도나 헌상에 대해서 계속 공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부터 주일저녁 시간에는 ‘찬송’에 대하여 공부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시간으로 ‘찬양해야 할 이유와 중요성’부터 배우겠습니다.

1. 찬양해야 할 이유

왜 찬송을 해야하는 것일까요? 교회에 나오자 마자 찬송가를 따라서 부르다 보니까 의례히 교회에 나오면 찬송을 하는가 보다 하는 정도의 생각에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왜 찬송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별의미 없이 하거나, 다른 이유 때문에 찬송하게 됩니다. 그래서 극히 초보적인 도리이지만, 이런데서부터 분명히 깨달아 가면서 더 깊은 도리 쪽으로 하나씩 배워 가야 하겠습니다.

⑴ 찬송하는 그릇된 이유들

찬송하는 이유나 목적이 잘못되어 있는 경우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은 찬양해야 할 이유나 목적을 별로 생각해 본 일이 없어서 뚜렷하게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때로는 알면서도 각성된 의식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다른 이유와 목적으로 부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① 예배의 분위기를 잡기 위한 도구

그 대표적인 경우는 예배의 분위기를 잡기 위한 목적으로 찬송을 부르는 경우입니다. 예배 시간 전에 인도자가 준비 찬송합시다! 해놓고, ‘찬송을 부르는 동안 자리 정돈 좀 해주세요! 위에 있는 분들은 앞으로 나와 앉아 주세요!’ 하는 경우를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회중들이 찬송을 올려드리는 데는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고 자리를 옮기느라 정신이 없게 됩니다. 참으로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인도자의 경우에만 아니라, 성도들도 예배 전에 드리는 중창단이나 그룹들이 있어서 악기를 동원하여 예배시간 전에 한 20분 동안 복음송을 부르도록 인도하여 분위기를 고조시킨 후에 예배를 시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찬이 갖는 고유의 목적보다는 예배의 분위기를 돋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또 때로는 말씀을 잘 받아들이도록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로 부흥집회 때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분위기를 잡기도 하고 말씀을 잘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사이사이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다가 지루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신나게 한바탕 불어제치도록 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신바람이 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씀을 듣습니다.

물론 찬송이 예배시간에 예배자로 하여금 신령한 정서를 가지고 하나님께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역할이 아주 중요하게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찬송가에 담겨 있는 시적이고 음악적인 요소가 사람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예배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을 갖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한 은혜의 작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럴지라도 찬송이 신령한 정서를 갖도록 돕는 수단으로서만 아니라, 찬송하는 그 시간이 실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② 자기의 감점을 만족시키거나 풀기 위한 도구

찬이 그릇된 이유와 목적으로 사용되는 또 다른 경우는 자기의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특히 요사이 젊은 청소년들이 즐겨 부르는 복음송의 가사나 멜로디를 보면 많은 경우에 흥돋구기용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 많은 찬양 모임들이 생겨나면서 젊은 청소년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단히 주님을 높이고 송축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기의 감정에 도취되어 부르는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또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은 그분들대로 한 풀이용으로 찬송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읊조리는 내용의 찬송을 즐겨 부릅니다. 새벽기도 시간이나 철야기도 시간에 눈물바람을 하면서 찬송하는 분들을 보면, 다 그러는 것이 아니겠으나 더러는 오랜 세월동안 쌓인 한을 토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중년층의 모매님들의 경우에도 가정에서 고부간에 겪는 갈등이나, 부부간에 겪는 갈등, 자녀들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를 예배당에 나와서 찬송을 통해 푸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찬송하는 목적이 자기 감정의 만족이나 한풀이의 마당으로 저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⑵ 찬송해야 할 정당한 이유

그렇다면 그릇된 이유와 목적으로 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찬송해야 할 정당한 이유와 목적을 바로 알고 그것을 늘 염두에 두고서 찬송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대로 찬송해야 할 이유를 분명히 깨닫고 드려야 합당한 목적으로 찬송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찬송해야 할 이유를 여러 가지로 말씀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사 43:7, 21, 시 148:1-5, 150:6)!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7, 21).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지어다! 그의 모든 사자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지어다!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시 148:1-5).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이렇게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찬송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께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그분의 솜씨와 능력을 보고 찬송해야 합니다. 그분의 창조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을 감사하며 찬송해야 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창조주를 찬양해야 합니다. 만물이 찬양해야 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었기에 온 피조물은 그분을 찬송하고 영화롭게 함이 마땅합니다.(롬 1:20-21 참고).

사실상 피조물의 자기 위치에서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밤하늘의 별들이 아름답게 운행하며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든지, 엄청난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캐년의 모습을 볼 때 자연 그 자체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광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으로 알수 있습니다. 온 우주 만물이 곳곳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합니다. 그래서 시인이나 바울 사도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②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엡 1:3-1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보다 더 어린양의 피로 주고 사신 당신의 구원받은 자녀들을 통해 부르는 찬송을 들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찬송은 창조의 목적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 무엇을 위한 구원인가?(엡 1:3-1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구원의 은혜를 받아 그저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그 자체에 목적이 되면 인본주의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그저 누리겠다는 심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본의를 잘 몰라서 하는 기복주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구원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찬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점을 바울 사도께서는 에베소서 1장에서 밝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3절에서 “찬송하리로다 !”하고 먼저 선언합니다. 그리고 4-14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하나 하나 소개하면서 각각 끝 부분에서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고 그 이유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창세전에 삼위 하나님께서 천상에서 회의를 열어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다고 합니다(4절상).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그 구원하는 일이 복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들 사이에서 분담이 되고 각 위들은 각각 어떠한 일을 담당하실 것인가 하는 것을 합의하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경륜적 삼위일체’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언약, 혹은 영원한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경륜을 펼치시려고 하실 때 먼저 창세 전에 세 위께서 계획하시고 분담하기로 합의하셨고, 그 합의에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께서 사역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는 그것을 계획하셨고, 아들은 그것을 실행에 옮기시고, 성령께서는 그것을 적용하시는 일을 하시기로 정하신 것입니다. 4-6에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7-12에서는 아들이 하신 일, 13-14에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 경우에 있어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함이라!” 또는, 그와 비슷한 말로 그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 6절과 12적과 14절에서 각각 그 이유를 반복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총동원하게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하려 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찬미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여광을 찬미’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한 구원인가를 놓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즐기고 누리기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라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 그래서 구원의 은혜를 참으로 맛본 후에는 항상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구원 자체가 신빙성을 잃게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기본적인 반응은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 홍해를 건너후 올린 찬양(출 15:1-21)

구원의 은혜를 받고서 찬양한 최초의 사건ㅇ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후 모세와 이스라엘이 올렸던 찬양입니다. 출 15:1-21에 그 모습이 나옵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 ···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이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출 15:1-2,11)

㉡ 다윗이 구원을 요청하면서 찬양하겠다고 고백한 내용(시 69:26-36)

다윗은 시 69편에서 자신을 핍박하는 원수들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하나님을 높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간구는 하나님께서 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지 그 본의를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무엇을 위한 구원’인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찬미하였습니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시 69:29-31)

여기서 다윗이 황소를 드림보다 찬양하는 것이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말씀한 의도가 무엇일까요? 이와 비슷한 표현이 삼상 15:22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사울에세 했던 말씀가운데 있습니다.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황소나 수양의 기름을 드리는 행위, 즉 헌상의 행위가 찬송이나 순종하는 행위보다 못하다는 그런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사실 황소를 드리거나 수양의 기름을 드리는 헌상의 행위 속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정신이 그 실체로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사무엘 선지자나 다윗이 비교하고 있는 것은 헌상행위 자체가 찬송이나 순종보다 못하고, 찬송이나 순종이 헌상의 행위보다 더 중요하다는 그런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황소를 드리거나 수양의 기름을 드리는 헌상의 행위 속에 마땅히 들어 있어야 하는 찬송하고 순종하는 정신의 실체는 빠져 버린체 받치는 헌상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마음을 바쳐서드리는 제사인 찬양이 의식적으로 드리는 제사보다 나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은 예수님께서 바래새인들을 향해서 타매하신 내용에서 그 의도가 잘드러나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래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도다 !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23:23)

헌상의 행위속에 마땅히 들어 있어야 할 정신으로서 의와 인과 신은 빠져버린체 드리는 헌상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요, 헌산이라는 신행을 하되 그 정신을 담아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신행을 행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행하여야 하지만, 그 틀속에 정신을 담아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떻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관대하시다고 높이는 행위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행위입니다. 헌상을 하면서도 이러한 찬송과 높임의 실체가 담겨 있다면 뜩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자체도 역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행위가 되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고서 올린 찬양시(시126:1-3)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시 126:1-3)

이 시는 에스라 때에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 한 때에 지어진 시로 생각됩니다. 70년 동안 타국에서 당한 압박과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한 몸으로 예루살렘에 돌아 오면서, 그드르이 마음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 넘쳐 찬양하셨던 것입니다. 마치 애굽에서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후 기뻐 찬양하였던 모습을 재현하였던 제2의 출애굽 사건이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만 찬양한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 사람들도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합니다. 이방인들도 이렇게 갑자기 일어난 그들의 귀환을 보고 이 일은 인간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백성에서 은총을 베푸시므로 믿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권능을 찬송하게 만드시기도 합니다.

그러한 예가 다니엘서에도 있습니다. 메대 바사옹 다리오는 사자굴에서 다니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보고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 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 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 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하였더라”(단 6:26-27).

2. 찬송의 중요성

이렇게 찬송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삶의 근거를 마련하셨기에 그 은혜를 찬송해야 하고, 또한 우리를 구원하셔서 인생의 가치를 십분 발휘하면서 살 수 있게 하셨기에 그 은혜를 찬송해야 마땅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찬송을 받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는 인생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에서 이탈하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이 땅에 내신 보람이나, 그 사람을 구원해 내신 보람을 말살해 버리는 행위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창조와 구원의 사역 가운데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과 은덕을 찬미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찬송은 마땅히 할 바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 창조와 구원의 목표에 대한 명료한 이해

여기서 우리는 잠깐 하나님의 창조하신 구원의 목표와 목적에 대한 이해를 명료화 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혹 목표와 목적에 대해서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잘 정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목표는 창조와 구원을 통해서 도달케 하시고자 하시는 어떤 정점에 해당한다면, 목적은 그 정점에 이르렀을 때에 가장 극치로 나타나는 효과에 해당합니다. 목표는 우리가 어디를 향해서 자꾸 자라가고 나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준다면, 목적은 그러한 방향을 행해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감으로 해서 어떠한 효과를 내고자 함인지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창조와 구원의 목표와 목적에 대한 명료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⑴ 창조와 구원의 목표(goal, target).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개인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더욱 영광스런 사람으로 자라서 영광의 정점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거룩한 품성을 주고받고 또 그들에게서 태어난 후손들이 함께 더불어서 거룩한 품성을 나누면서 더욱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가서 영광의 정점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하여 오히려 처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마저 오염되고 상실되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인생들을 구원하여 내신 의도는 창조의 목표를 회복하여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성부가 가지신 영광을 성자께 주셨고, 성자께서 가지신 영광을 성도들에게 주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을 닮은 사람으로 자라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창조와 구원의 개인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을 닮은 인격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사회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이 반영된 거룩한 사회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리고 그들로부터 태어난 후손들이 다함께 거룩한 품성을 주고받아 하나님의 거룩하신 품성이 충일 하게 드러나는 사회를 이루기를 목표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런 거룩한 사회를 이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생들을 그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 가운데서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의중도 역시 창조의 목표인 거룩한 사회를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 속의 은혜를 받은 우리 성도들은,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발휘되기에 적응한 인격으로 자꾸 자라가면서 그 생명을 더욱 충만히 발휘하는데 목표를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삶의 목표나 신앙생활의 의의를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충일하게 드러나는 사회를 이루는데 목표를 두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표를 나의 삶의 목표와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고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어느 것에다 목표를 두고 나아간다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요, 신앙생활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것입니다.

⑵ 창조와 구원의 목적 :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하기 위함

앞에서 말씀드린 사항, 즉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발휘되기에 적응한 인격으로 자라가고, 사회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품성이 충일하게 드러나는 사회를 이루는 것은 창조와 구원의 목표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이러한 목표에 이르게 하시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어떤 목적을 이르게 하십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에베소서1:3-14 말씀에는 구원의 목표와 목적이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성부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신 목표는 하나님 앞에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합니다(4절). 그리고 선택하셔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목표에 도달하게 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6절). 또 성자께서 우리를 위해 피흘리심으로 죄 사함을 주시기로 예정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목표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10절).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키는 목적은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12절). 또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게 하심으로 Sl님으로 인치신 것도 구속이라는 목표를 위해서요(14절 상),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라고 합니다(14절 하).

정리하면, 개인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시키시는 목표에 이르게 하시고, 전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시키시는 목표에 이르게 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점점 더 흠이 없는 사람으로 거룩해져 가고, 거룩한 사회를 이뤄 가려고 할 때에 어디에 목적을 둬야 하는지를 명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으로 점점 더 자라가는 것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어서 어떤 도인의 세계에 이르고자 함이 아니요, 나의 그 거룩한 모습을 통해서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함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바른 목적의식을 가지고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또 거룩한 사회를 이루어 가는 것도 역시 그 가운데 잇는 사람들끼리 유토피아를 이뤄서 잘 살아보기 위함이 아니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루어 가야 합니다.

3. 찬송의 방법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셔서 당신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신 방법에는 크게 둘로 나눠집니다. 비인격적인 피조물과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부터 찬양을 받으시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⑴ 인간을 제외한 모든 비인격적인 피조물은 자신의 아름다움 자태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인간을 제외한 모든 비인격적인 피조물들은 자신의 아름다운 자태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부여하신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솜씨와 지혜와 능력과 위대하심과 신성을 찬미합니다.

⑵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받은 인간은 이성적인 작용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입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과 하신 일을 찬미하고, 하나님을 닮은 인격과 행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은 다른 비인격적인 피조물들과는 다리 이성적인 판단과 작용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우신 품성과 하신 일을 찬미하도록 지으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그분의 솜씨와 지혜와 능력과 사상을 찬미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들여다보면서 얼마나 지혜로우시고 능력이 많으시고 선하신 분인지를 생각하면서 찬송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입술로만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인격의 발휘와 선한 행실을 통해서도 찬미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들 가운데서 얼마나 택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미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책과 죄의 오염 가운데 잇는 사람들을 건져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혀 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기도하시는 가운데 그와 관련된 기도를 하셨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성부의 영광을 성자께 주셨고, 성자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렇게 하신 목표는 삼위 하나님의 하나되심 처럼 성도들 사이에도 하나되게 하시기 위함이요,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거룩한 품성을 덧입어야만 거룩한 품성의 발휘로 거룩한 사회를 이룰 수 있고, 거룩한 품성을 발휘하는 사람이나 거룩한 사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7-8).

⑶ 특별히 거룩한 사회를 이룸으로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니(히 2:10-12).

예수님께서 많은 하나님의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는 목적은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인용된 말씀은 시편 22편에 잇는 내용인데, 이른바 메시야 시라고 합니다. 다윗이 지은 시이지만, 장차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실 때에 부르짖은 내용을 예표적이고 예고적으로 다윗이 고난 중에서 부르짖은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내용은 회중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시 22:22-23).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 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시 22:25-26).

개인의 인격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 회중의 거룩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충일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품성은 성도들이 모여 거룩한 사회를 이루는 모습 속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인격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맺는 말

오늘은 찬송해야 할 정당한 이유와 중요성, 그리고 방법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찬송하며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 찬송하며 살기로 마음을 확정한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송축함이 우리의 입에서와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계속되고, 우리가 이루는 교회의 아름다운 사회성을 통해서 계속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시 33: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소요리 1문답)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시 34:1-3).

2

찬송의 의미와 실질

(엡 1:3-14, 시 69:26-36, 벧전 2:9)

지난 시간에는 ‘찬송해야 할 정당한 이유와 중요성, 그리고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였고, 오늘은 ‘찬송의 의미와 실질’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찬송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서 부르기도 하고, 또 찬송가는 열심히 부르는데 삶 가운데 찬송하는 자로서의 실질은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들이 많습니다.

1. 찬송의 의미

* 신행과 의미와 문제

어떤 신행을 행할 때에는 그 신행을 통해서 하나님께 표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알고서 해야 합니다. 제 의미를 담아서 해야 하는 것이지 아무런 의미 없이 하거나, 다른 의미로 대체해서 한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신행으로서 마땅한 의미와 가치가 발생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행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은혜들을 누리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해악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찬송할 때에도 그저 많이만 하거나 열광적으로 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찬송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명확히 알고서 의미있게 해야 의의가 있습니다.

□ 찬송이란, 하나님의 영광스런 성품과 기이한 행적을 선포하고 자랑하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찬송이 무엇인지, 그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른 의미를 담아서 찬송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선 대표적인 몇 구절을 찾아 보겠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 할지어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시 96:1-7)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시 34:1-3).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벧전 2:9).

이상의 말씀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찬송이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품성과 기이한 행적을 송축하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영광과 권능과 능력과 지혜를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귀와 위엄과 능력과 아름다움과 영광을 “자랑”하는 것이요 그분이 하신 광대한 일들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송축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2. 찬송의 실질

⑴ 찬송이라는 의식(儀式) 속에 실질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입을 벌려 ‘찬송가’를 부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런 품성과 기이한 행적을 송축하고 자랑합니다. 이렇게 일정한 가사와 곡에 표시된 사상과 정서를 따라서 입술로 찬송을 부르는 것은 일종의 의식, 틀을 통해서 실질을 표시하는 신행입니다. 따라서 찬송을 부르는 신행 속에는 항상 그 실질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입술로 찬송을 부를 때에 그 찬송의 가사와 곡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스런 품성과 기이한 행적을 높이는 사상과 정서를 품고서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사상과 정서가 살아나지 아니하고 입술로만 부른다면 거시에 찬송의 실질이 없게 됩니다.

찬송을 습관적으로 부르거나,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 부를 때에 찬송의 실질은 없이 부르게 됩니다. 찬송가의 가사와 곡에 담긴 사상과 정서를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품성과 기이한 행적을 음미하면서 송축하고 높이는 심정으로 불러야 찬송으로서 실질이 있게 됩니다. 의미있고, 실질이 있게 불러야 하나님께서 반드시는 찬송이 되고, 본인에게도 하나님을 높이는 정서가 더욱 함양되어지는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⑵ 인격과 행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스런 품성을 드러내고 높이는 찬송의 실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자랑하고 높이는 입으로 외친다고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격과 삶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덕을 선전하는 사상과 정서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인격과 행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스런 품성을 드러내어 선전하는 실질이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이나 거룩한 나라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할 수 있겠습니까? 입으로 외친다고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인격과 행실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성도 각자가 제사장과 같이 거룩한 인격과 행실이 있고, 교회적으로도 거룩한 나라로서의 거룩한 문화와 풍습과 정신과 교회안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선양되는 것입니다.

① 우리의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성품을 드러내며 살아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실질이 있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대제사장으로서 하셨던 기도 가운데서 그 점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려면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시면서, 주님 자신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혀 주시고, 제자들에게도 덧입혀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요 17:2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성부 하나님께서 갖으신 영광을 아들 주님께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아들 주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중생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씨와 같은 형태로 수여 받았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니라!”(요일 3:9).

그러나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감으로써 점점 더 충만히 그 영광을 더욱더 충만히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인품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품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품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품성, 즉 그리스도적인 덕성이 발휘되기에 적응하게 자꾸 우리의 인품이 개조되어 가야 합니다. 더욱 신령한 인품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발휘되기에 적응한 그릇으로 닦여져 가야 합니다.

“.....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下-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

“이로서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② 우리의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을 드러내며 살아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실질이 있는 삶입니다.

자식들은 인품만 아니라 행실로도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릴 수도 있고 욕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행실이 의의 열매로 가득하게 될 때에 거기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되고, 본인은 물론 이거니와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의를 찬송하도록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11).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실질적인 삶의 내용은, “의의 열매”가 가득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가운데 가득하게 맺어지는 “의의 열매”를 보고, 거기서 ‘하나님의 의’를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기에, 하나님을 아는 우리들에게서 맺어지는 품성을 보고서 하나님의 품성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어 하나님의 이름을 선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의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노래해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의 의가 선양되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노래하지만, 행실에서는 불의로 가득하다면 하나님의 의를 짓밟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의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의를 선양하고 의를 선양하고 살아가는 찬양의 실질이 있으면서 그 실질을 담아서 입으로 노래할 때에 그 노래가 찬양으로서 가치가 있게 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이로서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2, 17).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세상 사람들은 주의 어떠하심을 우리의 어떠함 속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믿는 성도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때에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역시 주믿는 사람은 다르다!”고 감탄하며, 결국 주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높이게 됩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함이라!”(벧전 2:9, 12).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갖을 때에, 그 선한 행실로 인하여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찬양입니다.

○ 삶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실질이 없이 하는 찬송이라면 찬송으로서의 의의를 상실한 것입니다.

아무리 입으로 아름다운 찬양을 부른다고 해도 인격과 행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실질이 없다면, 그러한 찬양의 껍데기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선전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인격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여야 하나님께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고 하지만 인격과 삶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멸시를 받게 한다면 결코 찬양으로서의 실질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격과 삶의 실질이 있으면서 하는 찬송만이 찬송으로서의 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요사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고 찬양 집회들이 여기 저기서 성행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찬송을 하면서 실지 인격과 삶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실질이 없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입으로는 찬송을 열심히 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행실을 드러낸다면, 어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선양(宣揚) 되겠습니까? 인격과 삶속에서 찬양의 실질을 회복하여야 우리가 입으로 드리는 찬양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인격과 삶으로 드리는 찬양의 실질을 담아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입으로는 천지가 떠나갈 듯 찬송하면서도, 행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까? 그가 하는 찬송은 ‘하나님의 찬양하는 실질’이 없이 외형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큰 소리로 목청을 돋우어 하나님을 찬양한다 해도, 행실로는 흑암에 머물러 있거나, 불의의 열매를 맺고, 악한 행실을 드러내며, 빛과 소금의 맛을 잃어 버릴 때,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찬양중에 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실질이 담겨져 있는지 자신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목청을 높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해도 삶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삶의 실질이 없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3

구약의 제사로부터

찬송의 정신을 배워야 함

(히 13:15-16, 레 6-7장)

첫 시간에는 찬송해야 할 정당한 이유와 목적, 그리고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고, 두 번째 시간에는 찬송의 실질에 대해서 생각하였습니다. 오늘은 찬송이 가지고 있는 성격과 정신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히13:15-16에 보면 찬송에는 제사로서의 성격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5-16)

여기서 ‘찬미의 제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에는 제사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찬송을 찬송을 할 때에 구약 제사에 담겨있는 정신을 담아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의 제사들 속에 담긴 정신들을 잘 터득하여 그러한 정신들을 담아서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1. 문맥 이해(9-14)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마라는 경고 !

⑴ 식물인가 은혜인가 ?(8-12).

히브리서 기자가 이 서한을 보내는 교회안에는 아마도 그릇된 가르침이 퍼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9절). 저자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독자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던 문제였으며, 모든 사람이 그것에 영향받을 위험성이 있었으며 어떤 이는 이미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이 있는지는 우리들로서는 상상하는 것 이외에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우선 근본적인 사실로서 저자가 참다운 영적 힘이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것은 그것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한 것에 유의 해야 하겠습니다. 아마도 이 서한을 쓰고 있는 교회 안에는 식물에 관한 규범을 너무 지나치게 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 음식은 주의 몸과 무슨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 그 교회 안에 있는 일부 사람들은 성찬식이나 일반 회중의 회식같은 것이 있을 때에 주님을 위해서 성별된 식물을 먹으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성별된 식물을 먹으면, 그리스도의 몸이 자기 안에 들어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희랍인들의 종교에 있던 생각입니다. 희랍 사람은 신에게 제물을 드리면 그 고기의 일부를 되돌려 받아 신전에서 벗들을 초청해서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제사 드린 음식을 먹으면 신이 그 고기 안에 있어서 사람의 체내에 들어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고기와 더불어 신의 생명이 인간의 몸과 마음에 들어 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희랍인들이 이러한 생각을 그리스도교에 가지고 들어와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식물이 그리스도를 사람의 체내로 인도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안에 들어오신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쓰여 있는 것은 성례를 지나치게 강조한 것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던가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성례에 대해서는 아무런 것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성례에 관한 것은 이 서한의 제작 계획 속에는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마도 퍽이나 이른 시기인 이 서한이 쓰여진 때에는 이미 성례 자체가 자동적으로 변화를 초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성례라는 것은 그것 자체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성례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신앙과 만나게 될 때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인데 그들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었을 는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히브리 기자는, 중요한 것은 ‘식물’이 아니라 ‘신앙과 은혜’라는 사실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⑵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13-14).

히브리 기자는 이어서 13-14에서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심과 같이 그리스도인도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인간이 사는 세계에서 추방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도 역시 범죄인으로서 비난당하고 위법자 속에 넣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이 세상의 생활과 떨어져서 이 세상의 문 밖으로 나아가서 그리스도가 받으신 비난을 달갑게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합니다. 여기 지상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도성을 찾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분리와 고립과 치욕을 경험하지 안으면 안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이 세상이 주님을 대접하는 것과 같은 취급을 당한다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⑶ 어떠한 제사를 드려야 하는가?(15-16).

이어서 히브리 기자는, 그리스도인이 성례로써 그리스도의 제사를 다시금 드릴 수 없다고 하면 도대체 어떠한 제사를 드려야 하는가에 대해서 15-16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제사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15에는 “항상 드리는 찬미의 제사”라고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로서 찬양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16에서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는 제사”라고 합니다. 선한 행실이라는 삶의 열매로 드리는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례를 통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입술로 찬양하거나 행함으로 제사를 드려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미를 바로 이해하려면 제사가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찬미하는 사람들이 담아서 드려야 할 정신은, 구약 시대에 제사드리던 정신 속에서 배워야 합니다. 찬송의 내용으로서 어떠한 것들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지를 여러 제사 속에서 배워야 합니다.

2. 구약 제사의 종류와 각 제사에 담긴 정신

구약 시대의 제사 제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그 속에 다양한 정신들을 담아서 표하였습니다. 제사에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각 제사에 담긴 정신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⑴ 속죄제와 속건제(레 6:24-7:10).

첫째는 죄에 대한 제사인데, 주로 죄를 짓고 죄에 대해서 속량해 주시기를 바래서 그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혹은 남에게 잘못했으면 그 일에 대해서 그 허물을 자시가 보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속죄에와 속건제가 있습니다. 이 둘 다 속죄를 구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⑵ 번제(레 6:6-13).

그 다음은 속죄의 큰 의미를 거기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자기를 전부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정신을 겸하여 확실히 발휘해서 터럭 끝 하나라도 남김 없이 다 태워서 드리겠다 해서 ‘태울 번(燔)’자를 사용하여 번제하고 하는 제사를 드립니다. 이 번제에는 헌상의 정신이 있습니다. 자기의 전부를 헌신하는 고백을 담아서 표하는 것입니다.

⑶ 소제(레 6:14-18).

그 다음에는 소제라고 해서 평소에 매일 매일 자기가 먹는 떡을 빚는 고운 가루를 드려서 제단에다가 놓는 제사가 있습니다. 곡식을 완전히 빻아서 드리는데는 큰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과 매일 매일의 자기의 행진, 행보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한 부분도 자기가 살아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입니다.

⑷ 화목제(레 7:11-21).

그리고 그 단계를 넘어가서 마지막에는 화목제 혹은 평안제라는 제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제물을 받으신 것으로 확인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드린 자에게 주시면 드린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와 자기 식구들과 함께 앉아서 그것을 먹게 하시는 제사입니다. “네가 나에게 주었는데 나는 이것이 내 응식(應食), 나의 먹어야 할 식물이니까 내가 참 잘 받았다! 너도 나하고 함께 먹자!”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화해, 교통, 그 화기 애애한 가운데 거룩한 교통을 하는 이것이 제사에 있어서 정점입니다.

3. 찬미가 제사라는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

⑴ 찬송할 때에 제사의 정신을 담아서 드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찬송은 제사에 담긴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속죄의 의미, 자신을 전적으로 드린다는 헌상의 의미, 자신의 매일 매일의 삶을 온통 드린다는 성별의 의미, 하나님과 기쁨을 나누고 교통한다는 의미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할 때, 거기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① 사죄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죄를 자복하고 사죄를 구하는 심정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②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리겠다는 헌신의 고백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받아 주십사 하는 간절한 심정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③ 자신의 모든 삶과 인생의 행보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심정이 표현되어야 합니다.

④ 하나님과 화목하는 기쁨이 표현되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지금 예배시에 찬송 중에 이러한 정신들이 잘 들어 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정신들이 잘 담겨 있다면, 그 찬송은 예배시에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으로서 적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의 정신들이 결여되어 있다면 찬송으로서 적합지 않은 것입니다.

⑵ 엄밀한 의미에서 찬송은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

모든 찬송이 전주 다 하나님 앞에 직접 드리는 것이 반드시 되는 것은 아니나, 제사라는 의미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직접 드리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예배시에 드리는 찬송은 하나님께 직접드리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찬송이어야 합니다. 그 시가 하나님을 직접 기쁘시게 하려는데 집중하는 정신으로 모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구걸하고,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개탄하고 하나님 앞에 무엇을 조르고 하는 것으로 쓰지 않아야 합니다.

시 가운데는 형제를 부르는 시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는 시도 있고, 또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간구하는 시도 있고, 감사하는 시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적당한 찬송은 그 가사나 시가 하나님의 속성과 영광을 기리고 모시는 글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찬양하는 것으로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여러 가지 은혜를 생각하고 주는 어째서 나에게 이렇게 평안한 마음을 주셨는가 감사하다고 그런 찬송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하나님 당신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과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또 하나님의 기이하신 지혜와 능력과 거룩함을 찬송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그 도덕적인 속성 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또 하나님의 그 무소부재와 무소불능하심과 같은 독특한 속성들에 대하여 언급해서 찬송을 하는 것이 예배시에 적당한 찬송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해주신 내용을 가지고 그분의 그분 되심을 찬양하는 것이지. 주관적인 체험에 의해서 갖게된 하나님의 대한 지식에 의해서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 객관성이 결여되고 자꾸 자기의 주관적인 사건이나 체험에 근거한 내용들을 공동체가 한께 공유하여서 드릴 예배찬송으로는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 드릴 때는 공동으로 발하는 소리이기에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모두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계시된 하나님 되심을 찬양하여야 합니다. 설교에 적당한 말을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공동으로 하나님께 직접 돌려야 할 내용을 담아서 드려야 합당합니다.


○ 그러나 신령한 노래도 있습니다! (엡 5:19).

이렇게 사람에게 무엇을 호소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개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 직접 부르는 찬송은 주로 예배시에 사용하기 때문에, 소위 ‘예배찬송’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꼭 직접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꼭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찬송이 아니더라도,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하고 감격해서 노래로써 그것을 표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령한 노래’라고 합니다. 주로 주관적인 체험의 내용이 담긴 노래요, 복음을 전하기 위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몇 사람이 모일 때까지도 꼭 예배찬송만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신령한 노래도 자꾸 부를 대 신령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으로 흠이 없어야 합니다. 원래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이 흠이 있든지 비리 먹었든지 못쓰게 된 것은 절대로 안 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골라서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것이라야 합니다. 또 제사를 드리러 가는 제사장도 흠이 있는 사람은 제사 드리는 권리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레21:16-24). 흠이 없고 온전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따라서 예배시에 찬송을 드릴 때도 하나님께 드리기에 흠이 없이 적합한 가사와 곡으로 된 찬송을 선별하여 최상의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예배시에 주관적인 체험이나 개탄하는 내용이나 다른 사람에게 호소하는 식의 신령한 노래나 복음송을 불러서는 안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직접 드리기에 적합한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찬송하는 사람에게도 찬송하기에 흠이 없도록 마음가짐이나, 행실을 잘 갖춰서 드려야 합니다. 찬송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행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실질이 없다면 찬송하는 사람으로서 흠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지난 시간에 드린 말씀과 관련된 얘기입니다. 삶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의 실질이 없이 입으로만 찬양한다고 하나님께 찬양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4

찬송어의 의미 ①

- 할랄 : 칭송과 자랑 -


지난 시간에는 찬송이 제사로서 갖는 성경에서 찬송이 어떠해야 하는지 몇 가지의 교훈을 얻었습니다. 찬송에는 제사의 정신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찬송하는 자는 제사 드림에서 찬송하는 정신을 터득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죄를 구하고, 자신을 헌신하고, 삶의 구체적인 영역을 성별되게 헌상하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는 정신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내용으로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독백하듯이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식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께 올리는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나 및 사람이 모여서 신령한 노래들을 자꾸 부르는 것도 신앙에 아주 이익하다는 사실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드리는 자나 찬송 자체에 흠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찬송을 드리는 사람이 찬송하는 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정당하게 갖춰야 하고, 찬송하는 극이나 가사 자체도 하나님께 찬양하는데 적합한 것을 선별해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찬송할 때마다 제사 드림의 정신을 잘 담아서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신, 구약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여러 찬송어(讚頌語)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살피면서 찬송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합니다. 성경 원어는 한양에 대해 아주 다양하고 풍부한 어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찬양, 찬미, 감사, 송축, 찬송, 존영 등으로 번역되어 있는 이들 찬양어들은 모두 하나님의 성품과 하신 일들을 드러내어 하나님을 높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상황과 동기, 과정 및 결과에 있어서는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데 이 다양성을 통해 성경은 우리에게 부딪히는 여러 상황이나 환경을 극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찬양어들 중 중요한 것 몇 가지를 통해 하나님 나라 안에서 찬양이 가지는 구체적인 의미들을 확인하고, 우리가 구체적인 삶의 어떤 상황에서 그것을 누릴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할랄’의 찬양에 대해서 생각하겠습니다.

1. 구약에 가장 많이 사용된 ‘할랄’이란 찬양어의 의미

⑴ ‘할랄’은 하나님을 칭송하고 자랑할 때 드리는 한양입니다.

성경의 찬양어 중 가장 자주 등장하면서도 핵심적인 단어는 “떠벌리다, 주책이 없이 굴다”와 같은 뜻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마음이 온통 빼앗겨 그 사람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고 흥분된 마음이 일기도 사여 때로 좀 주책 없이 굴기도 하지 않습니까? “할랄”이 바로 그런 찬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로인한 벅찬 감격이 흘러 넘쳐 남 보기에 바보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열렬히 자랑하는 것입니다.


‘할랄’이란 한마디로 거품을 품고서 ‘자랑’하고 ‘칭찬’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본인 앞에서는 ‘칭찬’(칭송)을 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자랑’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 대한 감격이 있어서 감격적으로 반응을 보이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칭송하게 되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자랑하는 것으로 감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⑵ ‘할렐루야’란 “여호와를 칭송하고 자랑하자!”고 권면하는 말입니다.

할렐루야는 할랄의 한 형태인 ‘할렐루’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한 형태인 ‘야’가 결합된 말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를 찬양하라!’ 입니다. 이것을 할랄이 가지고 있는 뉴앙스를 살려서 달리 표현한다면, ‘여호와를 칭송(자랑)하라!’가 됩니다. 너무나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감격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자랑하면서, 여러분도 ‘여호와를 칭송하고 자랑하십시오!’라고 외치는 감격적인 외침입니다.

따라서 할렐루야는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가 강하게 느껴질 때 거의 저절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이며, 하나님의 현존과 그 능력 앞에서 솟구치는 놀라움과 기쁨과 감격의 외침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강렬히 의식되어 그 놀라움을 도저히 말로 표현할 우 없을 때 우리 안에서 분출되는 찬탄의 소리가 바로 할렐루야입니다. 그래서 헨델의 메시야 중에서 유명한 합창과 ‘할렐루야 코러스’가 처음 연주되었을 때에 그 자리에 입석했던 국왕이 너무나 장엄함에 자신도 모르게 기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이 “할렐루야 코러스”가 연주될 때에는 기립하여 듣는 습관이 있습니다. 요사이에는 그런 의미도 없이 그저 관례처럼 기립하여 듣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든 위대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식할 때 당연히 그리고 언제나, 영원히 일어나야 할 반응, 그것이 바로 ‘할렐루야’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어느 나라에서나 번역하지 않고 ‘음역’을 하고 있습니다. 만국의 공통어가 되었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나 ‘할렐루야!’하면 서로 통하는 감정이 같기 때문에 구태여 번역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그 의미가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할렐루야’가 담고 있는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할렐루야!’라고 외치면 막연하게 “여호와를 찬양하라!” 뜻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좀더 구체적으로“여호와를 칭송하라!” “여호와를 자랑하라!”의미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2. 과연 하나님을 자랑합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을 더 자랑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할렐루야’를 외치고 부르기는 잘 하면서도 실지로는 하나님을 자랑하기 보다는 다른 것을 더 자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기서 “나는 과연 하나님을 자랑하는지, 아니면 다른 것들을 더 자랑하는지?” 자신을 살펴야 할 줄 압니다. 여러분이 거품을 품고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이 무엇이고, 누구입니까?

하나님 이나 하나님께서 하신 일보다는 자기가 가진 어떤 것을 더 자랑하지는 않습니까? 아름다운 집이나, 재능이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며느리나, 자기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나 그들의 작품을 더 자랑하지는 않습니까? 지식이나, 명예나, 건강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자랑하는 것들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러한 것들을 자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거품을 품고서 주책없이 자랑할 것들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거품을 품고서 자랑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믿는 성도인 여러분은 그런 것들을 자랑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한 일을 자랑하기 보다는 자기의 교회의 건물이나, 시설이나, 자기 교단이나, 교회 이름이나, 자기 교회의 지도자나, 전통을 자랑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그런 것들을 더 자랑하면서, 입으로는 ‘할렐루야!’라고 습관적으로 외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할렐루야!’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자신이 하나님이나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자랑하기 보다는,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들이나 모임, 교회, 책을 더 자랑하였던 것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통회하면서 다음과 같이 간구하였습니다.

"사람을 자랑하고,

책을 자랑하고,

전통을 자랑하던 구습을 버리게 하시고,

하나님만 자랑하는 새 습관을 갖게 하소서 !

주님의 위대하심을 보게 하소서 !

주께서 하시는 위대한 일들을 보게 하소서 !

그리고 자랑하게 하소서 !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게 하소서 !

정신없이 지껄이게(?) 하소서 !

오직 하나님을 자랑삼아 보게 하소서 !


선조들의 아름다운 신앙과

그들이 물려준 좋은 유산들을 귀하게 여기고,

자랑스러운 것으로 받아서 계승하게 하소서 !!

그러나 그분들에 대한 존경과 자랑에 가려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하신 일들을

칭송하고 자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


이렇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자랑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한 일을 자랑해야겠다는 소원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신앙의 선조들도 모두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자랑하였던 모습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 다윗 왕

다윗 왕은 수없이 많은 시와 찬미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자랑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15:2절을 보십시요 !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할랄’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할랄’할찌어다”

○ 바울 사도

사도 바울도 오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복음만을 자랑하였습니다. 바울이 실라와 함께 제2차 전도여행 시에 억울하게 매를 맞고 쇠고랑을 차고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주님을 찬양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가장 귀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과 그 분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주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상)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라 !...”(롬 1:16)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주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거나, 바둑이나 야구 또는 학문이나 예술에 종종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 것을 잘 용납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에는 질색을 합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반하지 않고는 입에 거품을 품으면서 하나님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삶속에서 얼마나 하나님 자랑하고, 주님을 자랑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 후, 하나님께서 그것보다 얼마나 더 중요하고 귀한지를 묵상하십시오 ! 하나님 외에 이것 아니면 안 된다고 집착하고 있는 사람이나 다른 대상 위에 하나님을 올려놓으십시오 !그 때에만 하나님 자랑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자랑하고 싶지만, 그저 막연히 “하나님 당신은 위대하십니다. ! 정말 위대하십니다. !”라고 말한다고 해봅시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칭송이 아닙니다. 막연하게 위대하다고만 할게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구체적으로 들어서 칭송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내가 어떤 독창회에 갔다고 해 봅시다. 연주가 다 끝난 후 그에게로 가서 “나는 당신을 칭찬합니다. 정말 칭찬합니다”라고 말한다고 해봅시다. 이것은 칭찬이 아닙니다. 나는 그의 어떠한 점을 칭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은 훌륭한 성악가입니다. 당신이 노래 부르기 시작하자 내 마음은 온통 당신의 노래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도 쳐다보았는데 그들도 온통 당신의 노래에 취해 있었습니다. !”

자기의 아이와 함께 길을 가고 있는 한 부인을 보았다고 합시다. 내가 달려가서 난데없이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고 “오, 부인 저는 부인을 흠모(찬양)합니다. 흠모합니다. 진정 흠모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녀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마도 “미친 사람이군!”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실례합니다! 부인께서 이 아이의 어머니이십니까?”라고 한다면, 그 부인은 순순히 “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흠모라는 말을 한마디도 쓰지 않고서도 그 부인을 칭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귀여운 아이입니다 !

아이가 참으로 준수하게 생겼습니다 !

이런 아들을 두셔서 정말 좋으시겠습니다 !”

한 미술가 다가가서 “오,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존경합니다 !존경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는 다른 길로 달아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때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여기서 선생님의 그림을 쭉 감상했습니다. 컵을 든 손을 묘사한 기법이 너무 훌륭합니다 ! 마치 액자 밖으로 손이 나와서 이리 앉아서 이 컵을 받으라고 권하는 것 같습니다 !”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 얼마나 많이 그러나 아무 뜻도 없이 ‘찬양’이라는 말을 사용합니까? 우리가 쓰는 말들은 빈 상자처럼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왜 주님을 찬양하십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묻겠습니다. “왜 할렐루야 !”라고 합니까? “왜 주님을 찬양하자”고 합니까? 그렇게 물으면 별 까닭도 없고, 내용도 없이 “할렐루야!”라고 자랑했던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왜 칭송하고 자랑하라고 합니까? 오늘 본문 2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찌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 찬양하는지 반드시 알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말만 의미없이 되풀이하면서도 주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자기 기만에 빠져 있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랑하거나 칭송할 수 없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지런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배워가야 합니다.


5

찬송어의 의미 ②

- 야다 : 의지함 -

(시 57편, 대하 20장)

지금 우리는 찬송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찬송이란 ‘제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찬송할 때에는 제사에 담겨져있는 정신들을 잘 담아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크게 네 가지 기억하십니까? 예, 사죄와 헌신과 삶 전부의 성별, 그리고 ‘찬송하다’는 여러 용어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할랄’과 ‘할렐루야’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할랄이란 ‘자랑하다’ ‘칭송하다’는 뜻이 있고, 할렐루야란 여호와만 자랑하자는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자랑하고 칭송하는 것이 찬송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과연 하나님보다 더 자랑하거나 칭송하면서 입으로만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지는 않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구약에서 ‘할랄’ 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찬양어인 ‘야다’에 대해서 생각하겠습니다. ‘야다’는 ‘(손을)들다’라는 뜻에서 출발하여 ‘(손으로)던지다’ ‘고백하다’ 및 ‘감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 야다는 환난속에서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결단의 표현입니다!(시57)

⑴ ‘야다’는 환난속에서 드리는 찬양입니다.

그 점을 우리는 시편 표제어를 살펴봄으로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손을 듭니까? 항복할 때, 또는 구덩이 같은 데에 빠져서 건져 달라고 도움을 구할 때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야다의 배경이 바고 그렇습니다. 모든 도움이 끊기고,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게 되고, 아무런 대책이 서지 않을 때 도움을 구하는 손을 펴 들고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바로 ‘야다’입니다.


⑵ ‘야다’는 환난속에서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결단의 표현입니다.

환난을 당할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주어집니다. 하나는 염려와 절망 속에서 주저앉는 쪽이고, 하나는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쪽입니다. 야다는 후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야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쪽으로 결단하고 선택하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특히 마음속에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있든 없든, 선하시고 신실하시고 인자하신 전능의 주를 믿고, 바로 그런 주님의 성품을 그 상황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감사하고, 그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환난 중에서 ‘야다’하는 시(시57편)


우리는 이 ‘야다의 찬양’ 즉 ‘환난 중에서 찬양’하는 대표적인 시로서 57편을 볼 수 있습니다. 7-9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 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 8내 영광아 깰지어다 !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 9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 하리이다 !”

다윗은 어떠한 형편에서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기로 결단하면서 감사하고 찬양하고 있습니까? 이 57편의 표제를 먼저 보십시오!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그러니까 이 시는 다윗이 사울 왕의 위협을 피하여 엔게디광야와 십광야로 피난다니던 때에 굴속에서 지은 시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삼상24장과 26장에 보면 그러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는 환난 중에서 굴속에서 지은 시입니다. 1절부터 쭉 보면 그가 환난 중에서도 좌절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쪽을 택하는 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1-3절)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4-5)

이러한 시의 내용으로 보아서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환난중에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기로 결단하고서, 하나님께서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줄 것을 확신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환난중에서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단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으며 감사하는 것이 ‘야다의 찬양’입니다.


○ 여기서 잠시 멈춰서 자신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언제 감사합니까? 언제 찬양합니까? 선물이나 도움을 받았을 대, 일이 잘 될 때,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등이 아닙니까? 그런데 ‘야다’는 그러한 조건만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처한 곤경에서 눈을 돌려, 그 백성을 돌아보시고 구원하시는 좋으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서, 믿음으로 그 선하심과 인자와 자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환난중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자포자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난중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과 자비를 고백’라고 하나님께 ‘맡기면서’ 하는 찬양이 ‘야다’입니다. 환난중에서 자기로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어서 손을 들고 하나님께서만 맡기겠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 환난중에서 건져 주실 것을 의지하고 감사하는 찬양입니다.

2. 야다는 강력한 영적 무기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세력 사이에는 끊임없이 전쟁이 있어 왔습니다. 사탄은 늘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여 좌절과 불신과 실망과 원망 속에 빠뜨리려고 해왔습니다. 여기에 대항해서 싸우는 무기 중 강력한 것 한 가지가 이 ‘야다’입니다. 이 야다의 찬양으로 영적인 전쟁에 나아가서 승리한 사건이 대하2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유다의 여호사밧 왕때 모압과 암몬과의 전투(대하(20장)

대하20장에 보면 ‘야다의 찬송’을 통해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남쪽 유대 나라의 여호사밧왕 때에 모압과 암몬 사람들이 침략하였는데, 유대 나라로써는 도무지 당해 내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열세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왕은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다 온 성읍에서 사람들이 모여 와서 여호와께 간구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은 성전 뜰 앞에 모여 있는 온 회중 앞에 서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6-12까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도 의 요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고백과 자신들은 대적을 도무지 당해 낼 수 없어서 오직 주만 바라본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이러한 여호사밧의 기도가 있은 후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 있던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여 예언하게 하였습니다. 그 예언한 내용이 15-1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예언의 요지는, 전쟁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에 침략자들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내일 항오를 벌여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치시는지 구경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 왕은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온 백성들도 여호와앞에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유대 나라의 찬양대였다고 할 수 있는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하나님을 ‘할랄(찬송)’하였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드린 찬송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나 드고아들로 나가는데, 그때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백성들과 의논하여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하나님을 ‘야다(찬송)’하게 했습니다. 환난중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찬송을 하게 한 그 내용은 21절에 있습니다.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할랄=칭송)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그러니까 환난중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칭송하게 한 것이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고백하는 찬양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리나(노래)’와 ‘테힐라(찬송)’가 시작될 때에 하나님께서 복병을 두어서 적을 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리나’(노래)는 ‘승리의 환호성’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터에 나가면서 군인들이 먼저 앞장서서 나간 것이 아니라, 성가대원들이 앞장서 가면서 ‘승전가’를 불렀던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과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싸우시겠다는 약속을 (17) 굳게 믿고, 이미 이긴 싸움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승전가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테힐라’(찬송)는 ‘할랄’(자랑이나 칭송하다)에서 온 명사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칭송하고 자랑하는 찬양을 하면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맺는말

여기서 유대 나라가 치뤘던 전쟁은 단순히 오늘날의 나라와 나라간의 전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와의 전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전쟁에 나갈 때에도 찬양대를 앞세우고 나가면 반드시 이기겠다는 식으로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찬양 자체에 무슨 신통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찬양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환난중에서 좌절하는 편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께 만 맡긴다는 의지적인 결단이나 고백이요, 영적인 전쟁에서 자기의 힘으로 싸우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실지로 누리게 됩니다. 환난중에서 하나님께 ‘야다’의 찬양으로 하나님만 의지합시다! 야다의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승리케 하시는 은혜를 덧입어 살아갑시다 !

6

찬송어의 의미 ③

- 바랔 : 송축 -

(출 18:10, 왕상 8:56, 에스라 7:27-28, 대하 20:, 욥 1:21-22)

우리는 찬송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찬송이란, 제사의 성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찬송에는 할랄과 야다의 찬송이 있다고 했습니다. ‘할랄’은 너무나 반하고 좋아해서 자랑하고 칭송하는 찬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다’는 환난 중에서 좌절하고 원망하는 편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감사하는 찬양이라고 했습니다. 야다는 특히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를 내다보고 감사하는 찬양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바랔’의 찬송에 대해서 생각하겠습니다.

1. ‘바랔’의 기본 의미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서 ‘할랄’이나 ‘야다’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찬양어는 ‘바랔’입니다. 바랔의 기본 의미는 ‘축복하다’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에게 복을 주실 때와 인간이 인간에게 복을 기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면서 찬양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그 때는 주로 ‘축복하다’로 번역됩니다.

2. ‘바랔’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감사’할 때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입니다 !

야다가 일반적인 ‘감사’와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고백하며 찬양하는 것이었었습니다. 환난 넘어에 장차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내다보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돌리는 감사 찬양입니다. 그런데 ‘바랔’은 이미 주신 복에 대한 반응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복에 대한 반응으로서 하나님이 복의 근원임을 고백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 이미 받은 축복에 대해서 감사하며 ‘바랔’하는 경우들

⑴ 모세의 장인이 드린 바랔(출 18:10).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시내산에 진을 치고 있는 모세에게 찾아 왔습니다. 그 때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고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모든 은혜를 베푸시고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면서 다음과 같이 찬양하면서 번제 물과 희생을 가져왔고, 그것을 장로들과 아론과 모세와 장인이 함께 하나님 앞에서 먹었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장인이 외친 소리를 들어봅시다 !

“...여호와를 찬송(바랔)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애굽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 밑에서 건지셨도다 ! 이제 내가 알았도다 !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10-11)

여기서 ‘찬송하리로다!’ 라는 말이 ‘바랔’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장인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와 복을 베푸심을 듣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송축하였던 것입니다.

⑵ 솔로몬 왕이 드린 바랔(왕상 8:56, 대하 6:4).

왕상 8장은 지은 성전을 봉헌하는 기사입니다. 그 가운데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면서 먼저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을 인하여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 !”고 하였습니다. 56절을 보시지요 !

“축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무릇 허하신 대로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빙자하여 무릇 허하신 그 선한 말씀이 하나도 이루지 않음이 없도다”(왕상 8:56).

‘모세를 통해서 허하신 말씀이 하나도 이루지 않음이 없다 !’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아마 출 19:4-6에서 약속하신 것과 그 이후에 가나안에서 이루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이 그대로 되었다는 고백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약속 하신대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고, 태평 성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도록 하신 것에 감사해서 “여호와를 바랔할찌로다 !”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였던 자기 민족을 구출하셔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평화의 나라를 이루게 하신 복에 감사하고, 송축하자고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⑶ 에스라가 드린 바랔(에스라 7:27-28)

하나님께서는 온갖 우상 숭배와 배도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앗수르 바벨론을 통해서 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바사 왕 아닥사스다를 통해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여호와로 귀환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조서를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원하는 자들에게 여호와로 귀환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성전을 재건하는데 필요한 은금 보화를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남는 것으로는 제물을 준비하고 임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배도로 인하여 이방인들에게 짓밟혀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에 감사해서 학사 에스라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바랔 하자 !’고 외쳤습니다.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 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여호와 여호와의 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또 나로 왕과 그 모사들의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에스라 7:27-28).

(4) 다니엘과 느브갓네살 왕이 드린 바랔(단 2:19-20, 3:28, 4:34)

다니엘서에 보면 바랔의 찬양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선 다니엘이 드린 바랔의 찬양이 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느브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할 수 있도록 이상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바랔’(찬송)했습니다(단 2:19-20. 당시 바벨론의 모든 다른 박사들이 도무지 해석할 수 없었던 느브갓네살 왕에게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지혜와 뛰어나심을 인정하게 하신 축복에 감사해서 ‘바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3장에 가면 느브갓네살 왕이 하나님을 ‘바랔’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를 풀무 불에서 지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서 드린 찬양입니다.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다니엘이 말하여 가로되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단 2:19-20)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 하셨도다 ”(단 3:28)

○왜 우리는 자신이 삶을 축복 받지 못한 삶이라고 생각합니까?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복을 깨닫지 못하거나 그것을 복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베푸신 복을 가볍게 여기거나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를 송축(바랔)하라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베푸신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과 은택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자가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하나 기억하고 잊지 않을 때에 자신의 삶이 얼마나 축복 받은 삶인가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송축하게 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바랔)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103:2)

3.바랔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바랔은 단순히 이미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드리는 송축만이 아니고, 그 은혜에 대해서 증언하는 찬송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들은 예들은 다 이미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해서 드린 송축의 경우들이지만, 거기에서 한 절음 더 나아가서 이미 베푸신 은혜를 증언하는 의미에서 드리는 바랔도 있습니다.

□ 브라가 골짜기(대하 20:24-26)에서 드린 바랔

지난 시간에 ‘야다’의 찬양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말씀드렸던 대하20: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유다왕 여호사밧이 군대 앞에 찬양하는 사람들을 세워 ‘야다’ 찬양을 부르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갑자기 서로 싸워서 자멸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지난 시간에「 읽었던 바로 다음 부분을 좀 보겠습니까? 24-26절까지 말씀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적진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보니 땅에 엎드러진 시체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 왕과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취하는데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능히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취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제 사일에 백성들은 한 골짜기에 모여서 엄청난 복을 베푸신 여호와를 ‘송축’(바랔)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풍성한 복을 단순히 그 순간 감사하고 마는 정도가 아니라, 후대에 증언하기 위해서 복을 베푸신 그 골짜기의 이름을 축복이라는 뜻을 가진 ‘브라가(바랔)골짜기’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오늘날까지 ‘브라가 골짜기’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바랔은 베푸신 축복에 대해 ‘감사’하는 경우만 아니라, ‘증언’하는 경우로도 쓰였습니다.


○ 송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그 나라의 부요 함이 증거 됩니다 !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며 드리는 ‘송축’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복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때 그렇게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 능력과 지혜, 그 나라의 풍요로움과 영화로움이 드러나게 되고 하나님께서 높임 받게 됩니다.

4. 바랔(송축)은 좋은 상황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

‘바랔’이 하나님께서 풍성한 복을 베푸실 때 감사해서 드리는 송축이라고 하니까, 꼭 복을 베푸시고 좋은 상황이 전개될 때만 송축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바랔(송축)은 좋은 상황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그 좋은 예입니다.

□ 욥이 드린 바랔(욥 1:21-22)

욥은 동방 최대의 거부로서, 하나님이 칭찬하실 만큼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하루 동안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 기막힌 일을 당한 욥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때 욥이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1:21 말씀입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 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여기서 욥은 자기에게 온갖 복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취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는 커녕 오히려 여호와의 이름의 송축하고 있습니다. 그가 여기서 드린 송축이 바로 ‘바랔’입니다. 복을 주실 때만 송축하고 거둬가실 때는 원망하였느냐 하면, 결코 그러지 않았습니다. 거둬 가실 때도 역시 송축하고 있습니다.

○ 욥의 아내의 반응 (욥2:9)--바랔(저주)하고 죽으라 !

그러나 환난이 끝나지 안았습니다. 이번에는 온 몸에 종기가 나서 재 속에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 욥의 아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9 말씀을 보시지요 !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여기서 ‘욕하고’는 원문에 ‘바랔’이라는 뜻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문맥을 통해서 볼 대에 ‘저주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 어떻게 욥이 환난 주에서도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었을 까요? (욥1:21, 2:10)

그러나 욥은 아내의 말을 어리석은 말이라고 일축하면서, 입술로 하나님을 저주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욥은 이와 같은 엄청난 환난 곳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아니하고 송축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하는 고백 속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1:21과 2:10말씀을 보시지요! 거기에는 공통적인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내용이 공통적으로 들어 있었습니까?

“····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바랔)을 받으실 지니이다 ! ”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 2:10).

욥은 환난 가운데 있으면서 그 동안 축복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환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권세와 계획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거둬 가신 환난의 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송축’할 수 있었습니다. 환난을 당했을 대에도 하나님을 자칫하면 우리는 낙심하여 자포자기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하는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 대 우리는 그 동안 축복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환난 너머 하나님의 권세와 계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7

찬송어의 의미 ④

- 자마르, 프살로 : 演奏 -

(출 15:2, 대하 20:28, 삿 4:23-5:3, 엡 5:18-19, 골 3:16)

우리는 지금 찬송과 관련되어 사용된 용어들을 살피면서 찬송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 어떻게 찬송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있습니다. ‘제사’의 의미가 있다고 했고, 할랄의 찬양과, 야다의 찬양, 그리고 바랔의 찬양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다양한 찬양 언어들이 있고, 다양한 경우에 하나님 앞에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은 ‘자마르’의 찬양에 대해서 생각하겠습니다.

1. ‘자마르’는 ‘악기의 연주에 맞춰서 흥겹게 찬양하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한 할랄과 테힐라, 야다와 토다, 바랔과 베라카는 기본적으로 ‘비음악적’인 용어들입니다. 그러나 ‘자마르’는 악기와 같은 음악적인 요소를 가지고 찬양하는 것을 뜻합니다. 악기를 연주하면서 하는 찬양이 ‘자마르’의 찬양입니다. 그저 “기쁘다”는 말만으로 그 기쁨을 나타내기가 부족할 대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콧노래를 흥얼거리거나 무엇인가 다른 방법을 통해 그 감흥을 나타내지 않습니까? 노래나 악기로 하나님과 그 하신 일을 찬양하면 그 감격과 기쁨이 크게 더해지는 것입니다.

⑴ 시편은 「미즈모르」로서 악기의 연주에 맞춰서 부른 노래였습니다.

이것의 명사형인 ‘잠라’는 ‘찬양의 노래 또는 악기 연주’를 뜻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파생한 ‘미즈모르’는 ‘시편’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이, 기본적으로 악기의 연주에 맞춰서 노래하는 찬양의 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표제를 보면 많은 경우에 어떤 악기 연주에 맞춰서 드린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시 4편에 보면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영장이란 말은 성전 음악의 지휘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현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길롯」으로 줄로 타는 악기를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노래’로 번역된 히브리어 「미즈모르」는 바로 「자마르」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세속적인 노래와는 구별되어 예배 때만 사용되고, 또 악기에 맞춰서 부르는 노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시는 지휘자의 지휘를 따라 현악기와 반주를 곁드려 불리어지는 음악적인 시 혹은 노래입니다. 그러니까 시편에 있는 시들은 거의가 다 단순한 시가 아니라 악기의 연주에 맞춰서 부르는 찬양(노래)인 것입니다.

또 시 5편에 보면 “다윗의 시, 영장으로 관악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관악은 피리와 같이 관을 불어서 연주하는 악기를 말하는데, 이 악기는 주로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를 돕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참조, 왕상 1:40, 사 30:29). 시6편에 보면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 스미닛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스미닛이란 제 8번째라는 뜻으로 본시가 불리워진 특정한 음률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또 7편에 보면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대하여 여호와께 한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식가욘」은 노래 분위기를 지정하는 말로 정열적으로 노래 부를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추정되나 아직 그 뜻이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또 ‘베냐민인 구시’는 이곳에서만 언급된 인물로 삼상 24:9에 보이듯이 다윗을 죽이려고 모함했던 인물 중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사울의 손에 의해 박해를 받던 시기에 자기를 모함하는 말을 듣고 열정적으로 기도했으며, 또한 본시를 저술하여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8편에 보면 “다윗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깃딧’이란 블레셋의 도시인 가드에서 다윗이 배운 악기 또는 노래의 분위기 등을 지시하는 용어입니다. 따라서 8편은 지휘자에 맞춰 일정한 분위기로 불리어지던 노래입니다.

또 9편에 보면 “다윗의 시, 영장으로 뭇랍벤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뭇랍벤」은 ‘벤의 죽음’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칼빈 선생의 주석에 의하면 본시의 가락을 맞출 때 사용한 당시 잘 알려진 노래의 처음 부분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 외에 많은 시들이 “···의 시, 영장으로···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시들은 “···의 믹담”으로 되어 있는데. 「금언시」라는 뜻입니다(시 16편). 그리고 “다윗의 기도”라든지 그냥,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는 시도 있습니다. 어떻든 시편에 있는 대부분의 시는 「악기의 연주에 맞춰서 부른 노래」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많은 시편의 표제에 「미즈모르」(노래)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악기의 연주에 맞춰서 노래하다’는 뜻을 가진 「자미르」에서 파생한 명사형으로써 ‘악기의 연주에 맞춘 노래’라는 뜻입니다.

⑵ 출애굽 후 드린 찬양 가운데 하나님을 ‘악기의 연주에 맞춰서 흥겹게 부르는 찬양’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출 15:2)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1-2)

여기 출 15:에는 몇 개의 찬양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1절에 있는 ‘노래’, ‘노래하다’, ‘찬송하다’는 모두 노래를 지칭하는 가장 보편적인 단어인 ‘쉬르’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절 상반절에 있는 ‘노래’라는 말이 자마르의 명사형인 ‘지므라트’로 되어 있습니다. ‘악기의 연주에 맞춰서 드리는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2절 하반 절에 있는 ‘찬송하다’는 말이 ‘축하하다’는 뜻을 가진 「나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건짐을 받아 홍해를 건너게 하신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너무나 감격하고 기뻐서 하나님께 찬양을 올렸습니다. 그 찬양의 내용 가운데 하나님을 가리켜 「지크라트」, 즉‘악기의 연주에 맞춰서 흥겹게 부르는 찬양’과 같은 분이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⑶ 여자 사사 드보라를 통해서 가나안 왕 야빈으로부터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 찬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삿 4:23-5:3).

“이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쉬르)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바랔)하라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쉬르)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자마르)하리로다”(삿 5:1-5).

이스라엘 백성이 사사 에훗의 죽은 후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가나안 왕 야빈의 존에 그들을 파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은 가나안 왕 야빈에 의해서 20년 동안이나 심한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심한 학대 가운데서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20년 동안이나 박해하던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셨습니다. 여자 사사 드보라와 장관 바락을 통해서 승리하게 하심에 기뻐서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께 노래한 내용입니다. 그들이 노래(쉬르)한 내용은 바랔)의 찬양과 「자마르」의 찬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을 인하여 하나님을 송축(바랔)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승전에 대한 기쁨으로 인하여 ‘흥겹게 악기의 연주에 맞춰 찬양(자마르)하자 !’는 것이었습니다.

⑷ 여호사밧 왕과 군대가 여러 악기로 합주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습니다 !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사람이 여호사밧을 선두로 즐거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그 적군을 이김을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무리가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합주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에 나아 가니라”(대하 20:27-28)

하나님께서 찬양대의 찬양을 앞세우고 나아가게 하시므로 모압과 암몬 사람의 연합군을 이기게 하시고, 3일 동안이나 거둬야 할 정도로 전리품을 주셔서 기쁨으로 개선가를 부르며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그들은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합주하며 예루살렘의 입성하여 여호와의 전에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자마르의 찬양은 특히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심에 기쁘고 흥겨워서 부르는 찬양입니다.

2. 「자마르」에 해당하는 단어는 「프살로」(ψαλλω)입니다.

자마르에 해당하는 신약의 단어는 「프살로」입니다. 그리고 명사적인 「프살모스」는 시편을 뜻하는 「미즈모르」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것이 영어의 psalm이 왔습니다.

⑴ 롬 15:9

롬 15:9에는 시 18:49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엑소몰로게오), 주의 이름을 찬송(프살로)하리로다 !“여기서 엑소몰로게오는 「야다」에, 프살로는 「자마르」해당하는 말입니다.

⑵ 약 5:13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프살로)할지니라 !” 즐거운 일이 있을 때에 악기 연주에 맞춰서 노래하는 것처럼 흥겹게 찬양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프살로는 즐거울 때에 흥겹게 부르는 찬양입니다. 우리는 즐거운 일이 있을 때에 흥겹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⑶ 엡 5:18-19, 골 3:16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프살모스)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프살로)하며”엡 5:18-19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프살모스)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엑소모롤게오)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프살로)”골3:16

‘시’는 프살모스(히, 미즈모로)이고, ‘찬송하며’는 「프살로」(히, 자마르)입니다. 악기의 연주에 맞춰서 하는 노래로 흥겹게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옥중에서 에베소 교회나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들이 함께 모이면 서로 흥겹게 찬양하라고 권면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빌립보 교회에게 보낸 서신에서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고 권면한 내용과 같은 의미의 권면이라 하겠습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이면 기쁨이 충만한데서 나오는 찬양(미즈모르)을 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모이면 ‘흥겹게 찬양하라(자마르) !’는 것입니다.

3. 찬양과 감사가 넘치기 위한 조건(엡 5:18,골 3:16)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냥 기쁨으로 찬양하거나 감사하라고만 말하지 않고, 어떻게 감사하면서 기쁨의 찬양을 할 수 있는지 그 조건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고 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 교회에 보낸 서신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하여’(골 3:16)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요건이 갖춰질 때에 기쁨으로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하신 역사와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곳에 기쁨의 찬양이 있게 되고 감사가 있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가는 사실이 없고, 말씀이 희귀한 무리들 가운데서는 기쁨의 찬양(미즈모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원망과 불평과 다툼이 있습니다. 무리가 함께 모였을 때 Sl의 충만하신 영사를 받지 않고 육신의 지배를 받으면 서로 원망하고 불평하고 다투게 됩니다. 그러나 Sl님의 역사를 충만히 받을 대에 거기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흥겨운 찬양이 있습니다. 서로 관용하게 됩니다. 또 무리 가운데 말씀이 풍성히 거하면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흥겨운 찬양이 있고, 관용이 있게 됩니다.

4. 어떤 악기로 찬양했습니까?(시 150:3-5) --오케스트라로 찬양하라 !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시 150:3-5).

여기에 어떤 악기로 찬양하라고 했습니까? 나팔은 금관악기이고, 비파와 수금은 현악기입니다. 그리고 퉁소는 목관악기요, 소고와 제금은 타악기입니다. 그러니까 오케스트라로 찬양하라고 한 것입니다. 모든 악기를 총동원하여 합주하며,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과 지극히 광대하심을 생각할 때에 과연 오케스트라로 웅장하게 연주하면서 찬양할 만한 분이십니다 ! 과거에 우리 나라의 왕정 시대를 생각한다면,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풍악을 울려 찬양할 만한 분이십니다. 그분에 대한 깨달음이 악기를 총동원하여서까지 찬양하고픈 마음이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맺는 말

그러나 기쁨의 실질은 없는데 악기를 동원하여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해 내는 것은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 성령의 충만하신 역사와 말씀이 풍성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광대하신 분이시고, 위대하신 일을 하셨는지를 아는 것도 아니고, 그로 인한 기쁨과 감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악기를 동원하여 인위적으로 감정을 조작하고 흥분되게 하는 일은 주의해야 합니다. 실제로 구원의 기쁨과 감격, 그리고 흥겨움과 감사가 충만하여서 그것이 자연스럽게 악기를 연주하면서까지 흥겹게 찬양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성령의 충만하신 역사나 말씀에 대한 풍성한 깨달음도 없고, 기쁨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 북을 쳐서 감정을 인위적으로 돋구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부흥 집회나 기도원의 집회에서 많이 있는데 참으로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특히 예배시에 찬송을 드릴 때에는 주님께 경외하는 심정을 표하기에 적합한 악기를 선별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로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피아노나 오르겐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부허한 종교 감정을 부추기거나, 한풀이용으로 사용되는 악기는 예배시에 적합치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베푸신 은덕을 인하여 감격하여 자유롭게 찬양할 때에는 그러한 감격을 표할 만한 악기들을 모두 동원하여 찬송 할 수 있겠습니다. 단지 예배시에 모든 회중이 경외하는 심정으로 올려 드리는 찬송을 부를 때에는 선별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얘기입니다.

8

찬송어의 의미 ⑤

(라카드, 카라르:춤)

(삼하 6:12-23, 출 15:19-21, 시 149;3, 150:4)

지금까지는 주로 입으로 하는 찬양과 악기의 연주에 맟춰서 하는 찬양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단지 입으로나 악기로만이 아니라 온 몸으로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기쁨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춤으로 찬양과 기쁨을 표현하기도 했다는 말씀입니다. 춤은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이것은 특히 공동체의 행사에서 공동의 감사를 나누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춤을 뜻하는 구약어로는 동사 ?훌?과 명사형 ?마훌?과 ?마훌라?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집단적인 춤을 가리킵니다. 이 외에 ?라카드?는 (껑충껑충) 뛰는 것을 가리킵니다(전 3:4). ?카라르?는 (빙빙) 돌다라는 뜻에서 출발한 동사입니다. ?하가그?는 절기 때 함께 모여서 추는 춤입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춤으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찬양이 그냥 마음으로나 입으로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찬양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해, 즉,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몸 전체에 우리의 마음을 실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로 주일학생들이나 중. 고등학생들과 대학. 청년들에게 있어서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율동을 하면서 찬양하는 행위는 정당하다 할 수 있습니다.

□ 찬양하는 모습의 다양성과 통일성

○ 찬양하는 모습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찬양을 경직되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에게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입으로 그리고 악기의 연주에 맞추서, 그리고 온 몸으로 찬양하라! 고 하는 시편 기자의 여러 권면을 볼 때에 다양하게 찬양할 것을 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구 획일적으로 어떤 한 패턴을 고집하면서 감정을 억누르고 표현의 다양성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주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 그러나 몸 놀림에는 통일된 의미를 담아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춤으로 찬양을 표현할 때에 상당히 오염된 요소가 개입될 수 있고, 왜곡된 감정이 그대로 표출될 수 있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는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요즘음과 같이 춤의 문화가 오염되고 세속화되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써는 교회에서 춤을 추어 찬양한다는 것이 참으로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몸놀림에 찬양의 가사와 일치한 의미를 담아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공동으로 모인 자리에서 의미 없는 행동을 각각 달리 자기 나름대로 표현하여 버린다면 무질서하게 되고 그릇된 감정과 흥분에 빠지기 쉽고 세속적으로 오염된 춤의 문화가 끼여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정한 의미를 담아서 통일성을 가지고 율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됩니다.

□ 춤으로 찬양하였던 경우

○ 다윗의 춤(삼하 6:13-15, 대상 15:29) -- ?카라르?와 ?라카드?의 춤

찬양의 사람으로 유명하였던 ‘다윗’이 춤을 추어 찬양하였던 사건이 삼하 6:13-15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길 때에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베 에봇?을 입었습니다. 베 에봇은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즉 제단 앞에서 직무를 행할 때 입었던 옷으로 엉덩이까지 내려오며 소매 없는 제사용 겉옷이었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베 에봇을 입고 춤을 추었다는 것은 춤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저 춤추는 시늉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는 길거리에서 “힘을 다해” 했습니다. 여기 14절이나 16절에서 말하는 “춤을 추는 것”은 ?카라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다윗 왕은 빙빙돌기도 하고(카라르), 깡충깡충 뛰면서 찬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삼하6:16 “뛰놀고 춤추는”, 21절 “뛰놀리라”, 대상 15:29 “춤추며 뛰노는 것”).

● 다윗에게 있어서 언약궤를 옮겨오는 것이 왜 그리 기쁜 일이었을까요?

⑴ 하나님의 언약궤를 중심부에 모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약 70년간(에벤에셀 전투로부터 20년간과 사울의 통치 기간 중 40년, 그리고 그후의 10년 동안)이나 바아레유다라고 하는 변방 한적한 숲의 도시에 머물러 있다가, 이제야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다윗성으로 옮겨지게 된 것에 대한 기쁨에서 였습니다. 법궤가 이스라엘의 중심부로 옮겨옴에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은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이제 영적으로나 형식적으로 모두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된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법궤를 지으라 하셨을 때는 지성소에 안치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성소는 성막의 가장 거룩한 곳이었으며, 또 그 성막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진의 중앙에 위치하여 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행진할 때에도 법궤를 앞세우게 하였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살라는 뜻에서 그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법궤가 7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있지 못하고 변방 숲의 도시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 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삶에 중심부에 모시고 살지 못하였다는 상징성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윗 왕 치세에 70년 만에 다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게 된 것입니다. 법궤를 이스라엘의 중심부인 예루살렘 다윗성에 있는 성막으로 옮겨온다는 것이 이렇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 왕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대상 15:29 라카드), 빙빙 돌기도 하면서(삼하 6:14, 16, 21 카라르) 춤을 추며 찬양했던 것입니다.


⑵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더욱더 다윗 왕을 기쁘게 하였던 것은 이번에는 아무 사고없이 무사히 다윗성에 까지 옮겨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삼하 6장 앞부분에 보면 3개월 전에 이미 바알레유다에서 다윗성으로 옮겨오려고 하였지만, 도중에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법궤를 붙들었다가 즉사한 사건으로 인하여 가져오지 못하였습니다. 웃사는 하나님의 법궤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좋은 의도로 붙들었지만,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레위인들만 법궤를 만지고 운반할 수 있게 하신 법을 어기었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은 것입니다. 이러한 기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신 법에 따라서 신행을 옮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새심 깨닫게 됩니다.

어떻든 그로 인하여 두려워서 다윗성으로 옴ㄹ기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석달을 있었는데,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집에 복을 주셨다는 얘기를 듣고 하나님의 진노가 풀린 것으로 생각하고 기쁨으로 가서 다시 법궤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런 사고가 없이 무사히 다윗성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다윗을 기쁘게 하였던 것입니다.

○ 시 149:3, 150:4(마홀)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149:3).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시 150:4).

이 두 구절에서 찬양에 무엇이 수반되고 있습니까? 악기 사용이 찬양의 방법인 것처럼 춤 역시 그렇습니다. 또 개인적인 경우나 집단적인 경우나 다 적용됩니다. 춤추어 찬양하라고 촉구하는 것을 보아서, 온 몸으로 찬양하기를 권장하는 것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율동을 곁들려 찬양하도록 권장하고 인도하는 것이 결코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 몸으로 찬양할 만큼 기쁨과 찬양하고픈 마음이 없는데 메너리즘으로 율동이나 손유희를 사용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특히 주일학교에서 별 의미나 감동이 없이 습관적으로 율동을 하게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찬양하고픈 마음이 있는 이들이 모여서 율동을 곁들려 찬양하는 것은 결단코 잘하는 일입니다.

2. 춤은 기쁨을 옴 전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기쁨이 클수록 그에 대한 우리 몸의 반응도 커지는 법입니다. 잔잔한 미소로 기쁨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정도의 기쁨이 있고, 또 크게 환호하며 손뼉을 쳐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기쁨이 더욱 넘칠 때에 우리 몸 전체가 그것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것이 춤입니다. 몸 전체로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 춤입니다. 그러니까 기쁨의 절정에서 춤이 나오는 것입니다. 최고한 기쁨이 있을 때에 몬 전체의 움직임인 춤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 시 30:11, 애가 5:15(마홀)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11).

여기 시 30:11에서 슬픔과 반대되는 용어로 춤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말의 대조를 다른 표현으로 하고 있습니다. 베옷과 기쁨의 대조입니다. 그러니까 베옷은 슬픔의 극치를 상징하고, 춤은 기쁨의 극치를 표현한 것입니다. 몸 전체로 슬픔을 표현할 때 베옷을 입고, 몸 전체로 기쁨을 표현할 때 춤을 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슬픔을 변하여 기쁨을 주실 때, 그 기쁨을 몸 전체로 표현하는 것이 춤입니다.

우리 마음에 희락이 그쳤고 우리의 무도가 변하여 애통이 되었사오며(애 5:15).

여기 예레미야애가 5:15에서도 무도와 애통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도는 희락의 표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춤은 몸 전체로 기쁨을 표현하는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출 15:19-21(메홀라)

출 15:19-21에 보면, 홍해를 건넌후에 극도의 기쁨을 춤으로 표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론의 누이요 선지자였던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니까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었습니다. 이 때에 춘 춤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춤’이라는 단어인 ?메훌라?였습니다. 그 때 미리암이 화답하기를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습니다.

○ 렘 31:4,13(마홀)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 ......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니라(렘 31:4, 13).

9

찬송의 목적과 유익

(시 69:30-31)

지금까지 찬송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 차례 생각하였습니다. 오늘은 찬송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고, 찬송하는 자에게 오는 유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은혜의 방도로 주신 신행들”이라는 큰 제목으로 “예배”와 “기도”와 “찬송”에 대해서 생각해 왔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의 방도”로 쓰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신앙을 담아서 하나님께 고백하고 표하는 “신행”으로 쓰입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이러한 신행들을 행하는 “목적”을 생각하여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신행들을 통해서 우리가 누리는 “유익”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는 방도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오는 유익을 생각할 수 있겠고, 우리의 신앙을 담아서 표하고 고백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향한 목적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가지를 혼돈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목적과 유익이 뒤 바뀌어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던한 목적으로 찬양하는가를 먼저 생각하고, 또 찬양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유익(은혜)은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I. 찬송의 목적(시 69:30-31)

찬양의 목적은 우리의 기쁨이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의 노래들은 다 자기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기쁨이나 즐거움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물론 직업적인 가수들은 듣는 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노래를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노래 자체가 좋아서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요. 또 관중들에게 듣기 좋게 부르는 것도 자기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입니다. 결국 자기의 기쁨과 즐거움과 인기를 위해서 노래하는 것입니다.

○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찬양을 드르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들으시는 분이 기뻐히 받으시도록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찬양하는 목적은 찬양하는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느 것보다도 찬양을 통해서 여호와를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 69:30-31)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그분이 하신 일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자랑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란 중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손을 들고 도움을 구하며 맡기면서 도우실 것을 믿고 감사할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야다의 찬양을 받으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하고 주신바 은덕을 송축하고 기릴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바랔의 찬양을 받으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감격스런 일이 있을 때에 악기의 연주에 맞춰서 흥겹게 부르는 찬양을 통해서도 기뻐하십니다. 자마르의 찬양을 들으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너무 커서 깡충깡충 뛰거나, 빙빙돌면서 온 몸으로 춤을 추며 드리는 찬양을 받으시고 기빠하십니다. 라카드나 카라르, 혹은 메홀라나 마홀의 찬양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어떻든 모든 종류의 찬양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찬양하는 자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찬양을 드릴 수 있을까에 마음을 많이 기울여야 합니다. 어쩌면 찬양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을까 하는 생각보다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을까에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찬양하는 자가 마음을 기울여야 할 일차적인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목적이어야지, 내가 무슨 은혜를 받고 기쁨을 누릴까 하는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이점이 혼동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하는데 보다는 내가 무슨 은헤를 누리고 기쁨을 누릴까에 더 마음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종례에 부흥회에서난 기도원에서 부르던 부흥송들은 거의가 자기 감정의 도취로 흘러갔습니다. 주관적인 체험이나 호소가 주종을 이루기 때문에 성삼위 하나님을 향하게 하기 보다는 자기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특히 복음송이 많이 보급되고 찬양생활의 대중화가 되어가도 있는 요사이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마음보다는 자기의 흥에 겨워서, 자기의 감정에 도취되어서 유행가를 부르듯이 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대학생들이 찬양하는 집회 같은데 보면 목청을 돋구어 찬양하는 것 같은데, 실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보다는 흥겨움에 도취되어 부르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 음악에는 그 자체만을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흥미나 감정에 도취되어서 부르게 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음악이 가지고 있는 매력 때문입니다. 음악에는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요소들이 있습니다. 음악을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요소인 리듬이나 멜로디나 화음은,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아름다움과 매력이 있습니다. 리듬이나 멜로디, 화음과 같은 음악적인 요소에 도취되면, 그러한 음악적인 요소들 자체를 즐기는데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찬송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각보다는, 찬송을 이루고 있는 음악적인 요소들 자체를 즐기는 쪽으로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중세 로마카톨릭이 음악의 장엄함이나 기교 쪽으로 빠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찬양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 중에는 아예 음악 자체를 즐기거나 기교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악기의 사용을 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당시에 찬양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쪽 보다는 음악의 기교나 장엄함 자체에 빠져있는데서 건져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정상한 시기가 아니었기에 그러한 방법으로라도 바로 잡아보려고 하였던 것이지,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꼭 잘하는 일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찬송을 할 때마다 왜 찬송을 하는 것인지 그 목적을 항상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찬송을 하면서도 음악적인 요소를 즐기기 위해서 하는 쪽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리듬이나 멜로디나 화음과 같은 음악적인 요소들 자체를 즐기는 쪽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찬송을 할 때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겠다는 소원을 뚜렷이 가지고 해야, 찬송 속에 담겨있는 음악적인 요소 자체를 즐기려는 쪽으로 빠지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들어서 스스로 즐겁고 불러서 스스로 감동을 받는 그런 음악적 쾌락은 금지되어야 합니다. 경배하는 마음없이 자기의 음악수준을 뽐내거나 즐거운 마음만을 갖기 원한다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저 자기도취가 되어 흥을 내고 격양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마음은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찬양하는 사람에게는 음악 자체를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마음의 경계가 뚜렷해야 합니다.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찬양을 하기 위해서 구비되어야 할 점은?

이제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꼭 구비되어야 할 점 두 가지를 생각하겠습니다.


⑴ 하나님께서 기뻐히 받으실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 입니다.

우선 찬양하는 사람 자신이 하나님께서 기뻐히 받으실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 자신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인격 혹은 품성이되지 못하거나, 그 사람의 전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이나 의뢰하는 심정이 결여되어 있다면, 아무리 훌륭한 가사로 되어 있고, 좋은 정서를 담은 곡과 리듬으로 된 노래로 찬양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히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하나님을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는 심정이나, 의뢰하는 믿음이 없다면 찬양하는 사람으로써 벌써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⑵ 하나님께서 기뻐히 받으실 만한 노래를 선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히 받으실 만한 신앙의 고백이 담긴 가사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서를 담은 리듬과 멜로디와 화음으로 된 노래를 선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가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내용으로 잘 되어 있는데, 곡속에 담긴 리듬이나 멜로디나 화음이 경외하는 심정을 담은 것이 되지 못할 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또 반대로 곡속에 담긴 리듬이나 멜로디나 화음은 경외하는 심정을 표현하기에 적절한데 가사가 적합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찬송을 이루고 있는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성삼위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것을 선별하여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사가 주관적인 체험으로 되어 있거나, 곡속에 담긴 정서가 자구 자기를 개탄하거나 호소하는 식으로 되어 있는 노래는 하나님을 향하게 하기 보다는 사람의 형편이나 처지에 집착하게 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노래는 피하고 객관적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나 하나님의 성품을 높이는 가사나,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정서가 담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래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점들을 잘 검토하여 선별해서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히 받으실 것입니다.

II. 찬송의 유익

지금까지는 찬양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찬양하는 목적이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데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도 있습니다. 찬양을 통해서 우리가 누리는 유익도 큽니다. 그 유익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지만, 큰 유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 음악이나 노래가 사람이나 짐승에게 미치는 영향

우리 사람은 어떤 노래를 부르고 듣느냐에 따라서 정서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심지어 짐승들까지라도 음악에 의해서 받는바 영향은 지대합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개척을 시작했을 때 지금의 김순님 성도님의 집에 사시던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아침 동트기 시작할 때부터 해질 무렵까지 하루 종일 라디오를 틀어 놓았습니다. “라디오는 내 친구 ~ ~” 하는 음악이 나오는 방송이 있지요. 주변에 있는 주미들에게는 어떠한 피해가 있던지 말던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그때 아래 집에 세를 들어 살았을 때이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하루는 그 분을 만나 왜 그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토록 라디오를 틀어 놓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 분 집에 소를 키우는데 음악이나 소리를 들려주면 그만큼 발육을 촉진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태아교육에서 음악이 좋다는 것 여러분도 다 잘 아실 것입니다. 또 스트레스를 받아서 정신질환을 앓는 분들에게도 좋은 음악을 듣는 것이 정서적으로 안정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요사이에는 음악요법이라고 해서 음악을 통해서 심리적으로나 생리적으로 발생한 병을 치료한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소음이 많은 곳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정서가 불안하게 되고, 심지어 지능도 떨어진다는 연구결과가 얼마전에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아마 저도 어렸을 때 소음이 많은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렇게 머리가 좋지 않고 정서적으로도 감정표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 저희 집은 제과점과 케키집이었기 때문에 여름철에는 거의 24시간 기계소음 속에서 살았거든요.

요즈음 아파트 지역에서 발생하는 소음의 정도를 측정한 결과들도 들어보면 기준치를 훨씬 웃돌아서 스트레스와 정신질환을 발생시킬 소지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사장 주민들이 진정서를 내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항 주변에 주민들도 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있고 보상을 해준다고 합니다. 심지어 “음악 듣던 물고기가 죽다!” 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적이 있다고 합니다. 1976년 그룹 ‘더 후(The WHO)’의 야외 공연시 관란하는 듯한 연주가 한창 진행되었습니다. 기성과 괴성이 뒤엉켜 온통 지옥의 아비규환과 같은 난장판이 끝났을 때 공연장 옆의 호숫가에 물고기들이 배를 하얗게 드러내고 죽어 있었다는 기사입니다. 그 이유는 공연장의 괴음을 이기지 못한 물고기가 떼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공연장에서 한바탕 일을 마치고 나온 인간들의 귀는 온전했겠습니까? 아마도 중병에 걸린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음악이 사람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큽니다. 그리고 어던 음악을 듣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영향을 받습니다.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노래를 부를 때에 좋은 정서를 갖게 되고, 나쁜 음악을 듣고 나쁜 노래를 부를 때에 정서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받습니다.

○ 찬양이 신앙인격에 미치는 영향 !

역시 우리가 어던 종류의 찬송을 부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인격이 달라집니다. 어떠한 찬양을 부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이나 정서가 달라집니다. 가볍고 흥분된 복음송이나 부흥송을 많이 부른다면 그렇게 가볍고 흥분된 정서가 자꾸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찬송을 많이 부른다면, 그러한 심정들이 품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에배시 부르는 찬송이나, 신령한 노래들이 이에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전인격을 놓고 볼 때에 말씀은 주로 지각 작용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고 묵상할 때에 깨달음이 생기고 지각에 변화가 일어나고 사고하는 것이나 가치가 바뀝니다. 물론 설교라는 것이 소리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소리의 리듬을 갖는 호소력에 의해서 정서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결국에 가서는 정서와 의지에 까지 영향을 미치지만, 그러나 지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가하면 찬양은 우리의 신앙인격 가운데서 특히 정서 부분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을 더욱 뚜렷이 갖게 되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나 헌상은 주로 의지의 작용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찬양은 주로 우리의 정서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서를 잘 담은 찬송을 선별하여 불러야 할 것입니다.


맺는 말

찬양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찬송을 할 때마다 찬송을 이루고 있는 음악 자체를 즐기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찬양을 통해서 누리게 되는 유익도 큽니다. 특히 정서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을 품게되고, 기쁨과 평안을 얻는데 큰 유익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거룩한 목적으로 주님 앞에 찬미를 드리면, 주께서는 들으시고 기뻐히 받으신 거룩한 표로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에도 그 기쁨을 나누어 주시고, 평안함을 주시고, 도 주님을 향한 더욱 간절한 신앙과 경외하는 심정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를 찬송한 사람다웁게 형제에 대해서도 항상 마음이 아름답고, 따뜻하게 대하게 하시고, 평안함을 늘 남에게 끼치는 이런 거룩한 상태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10

예배에서 찬송의 역할과 위치

(시 100:1-4)

우리가 찬송을 하는 목적은 우리의 기쁜을 만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목적으로 찬양을 할 때에 우리에게 오는 유익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을 더욱 품어가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안식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서 찬송의 역할과 위치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공예배 시간의 많은 분량을 찬송하는 것에 할애(割愛)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시작과 중간의 요소 요소에서 찬송을 하고, 그리고 예배를 마칠 때에도 역시 찬송으로 마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예배를 드릴 때에 찬송으로 시작해서 찬송으로 진행하여 찬송으로 마치는 것일까요? 그것도 한 번에 몰라서 찬송만 몇곡 부르고 헌금하고 설교하고 축도하고 마쳐도 될텐데, 왜 그렇게 몰아서 하지 않고 요소 요소에서 넣어서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예배시간에 여러곡의 찬송을 하는 것일까요?

특히 우리 교회에서는 예배의 찬송을 할 때 왜 영광송, 성삼위송, 헌상송, 경배송, 송영, 이렇게 장르를 나누어서 그것도 차서있게 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하는데는 신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찬송이 예배하는 역할과 위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찬송이 예배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예배에서 찬송이 어떤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러한 점들을 잘 배워서 찬송이 예배속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잘 사용하여야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1. 예배 속에서 찬송의 역할

⑴ 찬송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찬송은 예배를 인도해 가는 역할을 합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대로 예배를 시작할 때도 찬송으로 하고(전주와 영광송), 예배와 단계 단계를 이어갈 때에도 찬송으로 하고(성삼위송, 헌상송, 경배송), 예배를 마칠 때에도 역시 찬송(송영과 후주)으로 합니다. 이렇게 예배의 시작으로부터 끝까지, 그리고 진행과정을 찬송으로 이어가는데, 이것이 갖는 의미는 찬송의 인도를 받아가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찬송은 우리의 마으ㅁ, 혹은 정서를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 찬송이 예배를 인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이유는?

찬송이 예배를 인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이유는, 음악이 갖고 있는 힘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사람의 정서는 음악에 의해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음악을 구성하는 음구조는 인간이 지닌 감정 형태와 논리적으로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음악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리듬,멜로디, 하모니), 우리의 사람의 감정도 몸 속에서 움직이는 이러한 요소들에 의해 조절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음악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 감정을 갖게 해준다고 합니다. 음악은 인간의 마음을 달래 주기도 하고, 슬픔이나 애수에 잠기게도 합니다.

이렇게 음악이 사람의 마음에 강한 호소력을 갖고 있는 까닭은 음악이 갖고 있는 김급완화의 리듬이 생체의 리듬에 직접 작용하여 몸의 균형상태를 바람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모든 음악의 작용은 무의식 속에서 우리 몸과 마음에 들어와서 몸의 균형 상태를 조절하고, 감정과 경험을 조절하고, 행동을 결정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자신도 모르게 어던 감정에 빠지게도 되고, 어떤 생각에 사롭잡히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거나 손이나 말로 리듬을 맟추고 있는 것을 자주 겸험합니다.

이러한 음악이 갖고 있는 힘을 고대 사람들도 경험을 통해 직접적으로 그것을 알고 누리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여러분이 잘 알시는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유명한 ?시학?에서 비극론을 전개하며 합창대(코러스)의 역할에 대해 ‘카타르시스 이론’이라는 획기적인 사고방식을 제시했습니다. 음악에 의한 감정의 발산은 치료에 효과가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카타르시스란 과잉된 것을 스스로 배출하도록 돕고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 줌으로써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음악이라는 매체를 통해 나쁜 감정과 정신적 갈등이나 슬픔을 밖으로 내뱉게하여 마음의 해방감과 균형감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나쁜 감정을 밖으로 배출시킴으로써 정화시켜 주는 것이 카타르시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카타르시스 이론에 근거해서 ?그리스 비극?극을 써서 무대에 올려 놓았는데, 실지 그 당시 많은 관객들이 그 드라마를 보고 감동하여 슬픔과 고민을 방출하고 울적한 중압감에서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코러스(합창대)가 극의 크라이막스를 더욱 고조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마치 슬플 때 대담하게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눈물을 쏟아내면 슬픔도 진정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 장례식 때 울어주는 여자를 고용하는 풍습이 세계 각지에 있습니다. 직업적이기는 하지만 고용된 여자가 소리내어 눈물을 흘리며 구슬프게 곡을 함으로써 장례식의 슬픔을 한층 고조시키고 죽은 이의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들의 한탄과 슬픔을 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 비극에서는 코러스(합창대)가 우는 여자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관객은 무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자신의 우울한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감정을 정화시켜 주는데 음악이 큰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요사이 와서 의학계에서는 이 카타르시스 이론을 현대 음악요법의 기초가 되는 이론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음악이 가지고 있는 힘을 의학계에서는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병을 치료하는데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음악요법을 툥해서 마음의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있으며, 그 마음의 병으로 인하여 생겨진 신체의 병까지도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에 싸여 있는 나쁜 감정을 음악을 통해서 밖으로 배출시키가도 하고, 또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는 ‘리듬’을 사용해서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잡아주기도 해서 마음과 몸의 병까지도 치료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음악이 사람의 마음과 몸에 미치는 힘은 실로 큽니다. 음악은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이나 행동을 조절하는 힘이 단순히 말이나 글이나 그림보다 뛰어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신앙을 담아서 표현한 가사와 정서를 담아서 표현하는 곡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곡에 해당하는 부분이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찬송은 음악적인 요소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담아서 표현하는 신행입니다. 따라서 음악이 우리의 정서에 미치는 이런 힘 때문에 찬송이 예배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인도해 가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사는 시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어서 시가 우리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도 대단합니다. 산문식으로 길게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한 내용을 시적으로 표현하여 깊은 감흥을 일으킵니다.

○ 시편 기자의 권면(시 100:1-4)

성경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 이미 음악이 인간의 마음에 미치는 힘을 통해서 마음을 진정시켰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울증에 걸린 사울 왕을 다윗이 하프를 연주해서 진정시켰던 이야기는 음악이 인간의 마음에 미치는 힘을 옛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고, 음악을 통해서 카타르시스(정화)의 효과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例)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음악이 갖는 힘, 즉 인간의 마음(정서)을 조절하는 힘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가 예배시에 부르는 찬송이라 할 수 있었던 시편에서 ‘찬송의 인도’를 받아서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의미의 권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00:1-4 말슴을 다시 한 번 함께 읽어 보시지요.

온 땅이여 어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1-4).

그리고 시편은 종종 성전에 나아갈 때 불리워졌는데, 그러한 시편의 삼분의 일이 찬양이나 주를 찬송하고 감사하라는 권고로 시작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찬양과 감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해 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것처럼 음악이 우리 마음의 정서에 미치는 힘 때문에, 찬송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⑵ 어떻게 예배를 인도하는 것일까요?

음악이 우리의 마음, 특히 정서를 이끌어서 예배드리는 ‘대상을 향하게’ 하되, 점점 더 하나님께 향해 가까이 나아가도록 ‘예배의 흐름’을 인도합니다. 그리고 예배드리는 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기도 합니다.

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인도해 줍니다.

찬송이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되 하나님께 향하게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정서와 가사를 담은 찬송이어야 그러한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가사가 하나님을 향하도록 되어 있고, 곡에 담긴 정서가 하나님을 향하도록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찬송을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히 받으실만 한 찬송을 선별해서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래는 가사와 곡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사는 시적인 요소에 해당하고, 곡은 음악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이 ‘곡’은 음악의 내용이 되는 세가지의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리듬과 멜로디와 하모니(화음)입니다. 이 세가지의 요소에 의해서 정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술적이 아닌 시적으로 표현한 가사에 의해서 노래하고자 하는 내용을 압축하여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노래가 어떠한 시적인 가사와 음악적인 곡으로 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노래하려는 사상이나 정서가 달라집니다. 그 노래가 어떠한 가사와 곡으로 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마음을 향하게 하는 대상이 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가사의 내용이나 곡에 담긴 정서가 다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찬송이어야, 예배시에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인도해 주는 역할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가사의 내용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개탄하는 것이고 자기의 주관적인 체험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거나, 정서도 역시 감정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된다면, 하나님을 향하게 하기 보다는 자기의 감정에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감정이나 자신의 처지에로 인도해 가고 맙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배시에 부르는 찬송을 선별하여 부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② 점점 더 하나님을 향해 가까이 나가도록 ‘흐름을 이끌어’ 줍니다.

찬송은 우리를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에로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점점 하나님을 향하여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해 줍니다. 예배의 초기 단께에서 음악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자신을 향하도록 인도해 줍니다(전주, 영광송, 성삼위송). 그러다가 나중에는 하나님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옮겨서 인도하여 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태도는 그분의 존전에서 머리를 숙이도록 합니다.(헌상송, 경배송). 그리고 하나님의 존전에서 물러나면서 영워토록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송영, 후주). 이제 우리가 공예배시에 사용하는 찬송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 전주(시편낭독)

우리가 드리는 공예배는 반주자의 전주(프렐류드)로 시작합니다. 이 전주(프렐류드)는 예배에 참여한 회중의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만을 향하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회중의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만을 향하게 이끌어 준다는 것은 단지 배경음악으로서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전주(프렐류드)를 예배의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배경음악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전주가 언주되는 그 시간에 회중들은 각각 나름대로 기도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주(프렐류드)가 어떻게 예배에 참석한 회중의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만을 향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일까요? 회중들은 반주에 의해서 연주되는 전주의 리듬과 멜로디 그리고 화음에 맞춰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비록 연주하는 자는 반주자 한 사람이지만, 사실은 회중들 모두가 함께 그 전주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아시는 김두완 박사께서는 예배에 있어서 음악은 단순히 예배의 분위기 조성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을 “헌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주(프렐류드)는 단순히 예배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배경음악으로 연주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예배행위”인 것입니다.

따라서 온 회중은 반주자에 의해서 전주가 연주될 때에 각자 나름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주에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주(프렐류드)는 예배의 도입부에서 온 회중의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께 향하도록 이글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 전주(프렐류드)가 세상에서 찢기고 상하고 흩어져 있던 회중들의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께 향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주가 끝나면 예배인도자가 시편낭독을 하므로 회중의 마음을 예배에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주(프렐류드)와 시편낭독은 예배의 도입부에서 회중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이글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회중은 전주와 시편낭독의 인도를 받아서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 영광송

전주와 시편낭독이 있은 후에 영광송을 부릅니다. 이 영광송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하겠다는 마음을 표시하는 간단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회중들로 하여금 뭣하러 나왔는지 그 목적을 분명하게 해 줍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처음부터 장황한 내용을 가지고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영광돌리고 예배하러 나왔다는 마음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주일낮에 부르는 영광송이 짧막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

이 영광송은 초대교회로부터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은 동방의 그리스정교회와 서방의 로마캐톨릭교회의 통상문 가운데 나타나 있는 음악 작품중에서 [글로리아]에 해당하는 장르입니다. 교회음악 학자들에 의하면 그 기원을 누가복음에 기록된 탄생 기사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눅 2:14)


㉢ 성삼위송

그 다음에 성삼위송을 부릅니다. 이 성삼위송은, 예배의 대상이 성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심을 뚜렷하게 표시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베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예배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성삼위송이 예배의 대상은 어떤 분이신가를 바르게 인식하고, 바로 그분께 예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성삼위송은 동.서방 교회의 통상문 가운데 있는 음악 작품 중에서 ?상투스?에 해당하는 장르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성삼위송의 기원을 이사야 6:3에서 찾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것은 이사야가 소명을 받을 때 성전에서 스랍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은 찬송입니다. 이 노래는 그 뒤에도 계속해서 노래 불리어져 신약 시대에도 찬송되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계 4:8) 그리고 교회역사를 일관하여 찬송되고 있습니다.


㉣ 헌상송

이렇게 전주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영광송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려고 모였다는 마음을 표시하고, 또 성삼위송을 통해서 성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존전에 서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어떤 행동이 나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신앙고백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전부를 대표하는 헌물을 가지고 나아가 자신을 헌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전에 서게 되면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헌상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 전부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인식하게 되고,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께 헌상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헌상행위를 할 때에 부르는 찬송이 바로 ‘헌상송’입니다. 그러니까 이 헌상송은 회중으로 하여금 자신을 하나님께 헌상하겠다는 마음을 표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상송에는 주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자신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요. 마땅히 자신 전부를 하나님께 돌려드리오니 당신의 성의(聖義)로 써 주십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 경배송

그리고 이제 성경낭독을 하고 교회소식을 알리고 경배송을 합니다. 성경낭독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시간이고, 교회소식을 알리는 것은 회중의 교제시간 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과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회중가운데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경배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때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위대하신 사역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리며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배송’입니다. 그래서 경배송은 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이나 휘대하신 사역을 소상히 언급하면서 경배합니다.


㉥ 송영

경배송을 한 후에 설교를 통해서 회중에게 공도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다시 영광ㅇ들 돌리는 찬송을 합니다. 그러니가 예배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송영은 우리의 마음을 모아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였음을 다시 표시하도록 이글어 줍니다.


㉦ (축도) 후주

그리고 성삼위 일체되신 하나님께서 회중과 함게 하시기를 축복하는 기도를 하고 나서 반주자가 후주(後奏)를 연주합니다. 후주도 역시 전주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후주는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 향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특히 성삼위 하나님을 모시고 새 삶을 찾아 일상 생활로 돌아가게 해 줍니다. 그래서 전주때와 같은 자세를 취하면 됩니다. 후주를 단순히 분위기를 잡아주는 배경음악 정도로 생각하고서 각자 나름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후주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후주는, 하나님을 모시고 세상으로 파송을 받을 수 있도록 회중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인도해 줍니다.

이렇게 찬송은 예배의 요소 요소에 들어 있어서 회중의 마음을 하나님께 점점 나아가도록 예배의 흐름을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예배시간에 찬송의 인도를 잘 받아야 회중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게 됩니다.

③ 예배에 참여한 온 회중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찬송속에 있는 음악적인 요소가 회중으로 하여금 같은 정서를 품게 하고, 시적인 요소가 같은 내용을 가지고 경배하게 합니다. 특히 음악적인 요소 가운데 아름다운 하모니(화음)가 같은 정서를 품게 해 줍니다. 각 파트의 서로 다른 멜로디가 조화를 이루는 것을 통해서 성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공동의 정서를 품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인도해 줍니다. 찬송의 아름다운 하머니를 통해서 회중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찬송을 할 때에 회중 가운데서 불협화음이 나온다면 오히려 마음이 나뉘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도 예배속에서 찬송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2. 예배 속에서 찬송의 위치

이상에서 말씀드린 찬송의 역할 때문에 예배 속에서 찬송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에배의 시작부터 끝까지 찬송의 인도를 받아서 예배가 진행되기 때문에 찬송이 하나님께 제대로 드려지지 않는다면 그 에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으로 예배할 수 없습니다. 찬송의 실패는 예배의 실패요, 찬송의 성공은 에배의 성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예배시에 찬송을 바르게 드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공예배시에 드리는 찬송이 과연 다음 둘 중에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느냐를 살펴보면 찬송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을 향하게 하느냐, 사람을 향하게 하느냐?

2. 에배의 흐름을 돕느냐, 막느냐?

3.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느냐, 나뉘게 하느냐?


예배시에 찬송을 은혜의 방도로 사용하느냐, 잘못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다른 결과들이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배에 참석하는 온 회중이 찬송을 잘 익혀서 유익하게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찬송의 각 장르가 가지고 있는 의미도 분명히 알고서 드려야 할 것입니다.

11

에덴으로부터 족장사,

광야 이스라엘 공동체의 찬양

(시 19:1, 창 4:23-26, 9:26, 14:20, 29:35, 49:8, 15:1-24)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이땅에 두실 때까지 종신토록 찬송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니 주님의 나라에 가서는 영원토록 찬양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가서는 우리의 삶 전부가 온전히 주님을 찬양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찬양 외에 불평이나 원망과 같은 것은 아예 끼어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 이땅에 있는 동안에는 온전히 찬양하는 삶으로만 진행해 가지 못하고, 인생여정의 사이 사이에 원망이나 불평도 끼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를 이땅에 두시는 동안 어떻게 하면 찬양하는 삶의 행진을 계속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진행과정에서 찬양생활 가운데 끼어드는 것들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거부하고 일관성 있게 찬양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오늘부터는 찬양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서 역사가 우리의 찬양생활을 위해서 주는바 꼭 필요한 교훈들을 얻고자 합니다. 역사가 주는바 교훈은 실로 큽니다. 역사는 우리 자신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 됩니다.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못한다면 그들이 겪었던 전철을 되풀이 하는 어리석음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의 실패와 성공을 통해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여정에서 닦칠 것들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러한 것들을 뛰어넘기 위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때도를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에덴으로부터 족장사까지의 찬양

⑴ 에덴으로부터 탈에덴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이 언제부터 있었느냐고 할 때에, 에덴 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은 천지창조가 있은 직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하신 말씀 속에서 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뿐만 아니라 온 피조물과 천사들이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찬야하였습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인간과 천사들과 다른 피조물이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하모니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천사 루시퍼가 에덴 동산의 아름다운 화음을 깨뜨렸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꼬여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를 찬양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온 피조물까지도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⑵ 세속 음악의 시작

그래서 아담의 아들 가인의 후예 가운데 7대손인 라멕이 노래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오히려 두 아내를 취하고, 살인한 것을 자랑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타락으로 인한 죄의 오염이 노래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라멕이 자기의 아내들에게 노래하는 모습을 들어보십시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23-24).

그리고 라멕의 아들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라멕의 자식인 그가 어떠한 노래를 주로 불렀습니까? 뻔하지 않습니까? 이들이 ‘세속음악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노래의 소재는 살인과 음난한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세속음악은 오늘날까지 줄곧 그 부패함을 더해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록음악을 비롯한 온갖 세속음악의 소재는 ‘쌕스’와 ‘폭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가사만이 아니라, 그들의 음악을 이루는 멜로디나 리듬이나 화음까지도 오염되었습니다. 거룩하고 신령하면서도 때묻지 않은 기쁨을 노래하기 보다는,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육적인 쾌락을 자극시키는 것으로 오염되었습니다. 그리고 대중음악 뿐만 아니라, 복음성가에까지 그러한 세속음악의 리듬이나 멜로디의 물결이 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복음성가에도 말초신경을 자극시키며 유흥적인 멜로디와 리듬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젊은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좋아하는 록음악이라도 복음송에 도입하자고 하는 사람들까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⑶ 신령한 노래(찬양)의 시작

이렇게 세속음악의 흐름이 거세게 흐르고 있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을 통해서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4:26에 보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주신 셋이 에노스라는 아들을 낳고서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표현은 ‘찬양하였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셋의 후예들을 통해서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후 셋의 계열을 통해서 에녹과 노아와 같이 신실한 백성들이 계속되면서 그들을 통해서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특히 노아의 홍수심판 후에 다시 하나님께서는 셈의 후손을 통해서 찬양을 받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노아가 셈에게 한 축복을 보십시오. 창세기 9:26입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⑷ 셈의 후손의 찬양

그런데 노아의 여덟식구로 시작된 새 인류가 다시 타락하여 바벨탑을 쌓기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서 예고하시고 약속하신대로 셈의 후예인 아브람을 부르셔서 그를 통해서 또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창세기 14:20을 보시지요.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람이 자기의 조카 롯을 이방인의 손에서 건져서 돌아올 때에 제사장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가 하나님께서는 셈의 자손 아브라함을 통해서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의미에서 소유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십분의 일을 드리는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24장 27절과 4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베필을 구하여 오도록 보냈던 종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여 찬양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가로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창 24:27).

⑸ 야곱과 유다의 찬양 : 백성들로부터 찬양을 받으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또 창세기 29:35을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의 아들 야곱이 레아를 통해서 네 번째 아들을 낳고서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야다)하리로다” 하고서 그 이름을 ‘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의미는 ?찬송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49:8절을 보면, 야곱이 임종직전에 열두 아들을 축복하고 예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유다를 향해서 축복한 내용을 보면 찬양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이러한 축복의 내용은 장차 유다지파에서 나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될 것을 예고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유다지파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수 사탄의 목을 잡으시고, 또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절하게 되는 것으로 성취되어질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유다?라는 말이 ?야다?에서 유래한 명사형으로써 ?찬송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니까 예수님께서는 유다지파에서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환란 가운데에서 구원하셔서,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야다의 찬양’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2. 광야 이스라엘 공동체의 찬양과 원망(출 15:1-24)

그리고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찬양한 사건에 대한 기록은 출애굽기 15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넌 후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구원을 베푸신 은혜에 감사해서 찬양한 것입니다. 그들은 소고치고며 춤추어 찬양했습니다(출 15:1-21). 그 모습만 보면 대단한 신앙인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과 사흘이 못되어 마라에 이르렀을 때에 쓴물로 인하여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출 15:24). 그러나 하나님게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엘림에 이르렀을 때에는 물샘 열 둘과 칠십주가 있는 오아시스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아마 이때에도 그들은 기뻐서 어쩔줄 모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또 불과 얼마 후에 그들은 신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과거 애굽 땅에서 먹던 고기 가마곁에 앉아서 국물을 얻어 먹고 떡을 배불리 먹던 때를 생각하면서 차라리 거기서 죽도록 놔두지 뭐하려고 이곳 허허벌판 광야에까지 데려와서 여기서 굶어주게 하느냐면서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아침에는 꿀송이 처럼 단 만나를 내려 주시고 석양에는 메추라기 떼를 보내셔서 먹여 주셨습니다. 아마 그때에도 그들은 좋아서 어쩔줄 모르고 기버하며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웬일입니까? 그들이 신광야에서 떠나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에 또 백성이 물이 없다고 모세와 다투고 원망을 하며 왜 여기까지 데려와서 자식들과 생축까지 목말라 죽게 하느냐고 마구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또 역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호렙산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럴뿐만 아니라 그대에 쳐들어 온 아말렉도 멋지게 이기게 해주셨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그곳에 단을 쌓고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하였던 것을 보아서, 역시 이때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찬양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광야 초기여정을 지나 시내산 아래 이르렀을 때에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그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시고 인도하심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하는 내용이 있습니다(출 18:10). 그리고 시내산 아래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축복에 대해서 기뻐하며 또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속히 내려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면서 금송아지를 숭배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싸매시고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찬양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그들은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하여 정탐군을 보내었다가 그들의 보고를 듣고 다시 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를 우리가 가나안 족속들의 밥이 되게 하려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장관까지 뽑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정도의 신앙을 가진 그들을 데리고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거룩한 신국 건설의 사명을 맡길 수가 없다는 판단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불신의 세대를 광애에서 근 40년 동안 배회하다가 죽게 하시고, 출애굽 2세대 중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가나안 땅에 들여 보내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을 정복하는 시대와 사사시대에 간단한 찬양을 하지만, 다시 주님을 떠나고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면 간간히 찬양하는 모습을 봅니다(수 22:33, 삿 5:2,3,9).

그들은 이렇게 광야 여정을 지나 가나안을 정복하여 다윗왕정이 들어서서 찬양생활의 꽃을 피우기까지 원망과 불평을 되풀이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을 때는 좋아서 어쩔줄 모르며 찬송하였지만, 또 얼마가지 않아서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러한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의 여정에서 찬양새활로 일관되지 못하고 자구 불평과 원망이 끼어들었던 것은 그들의 신앙이 아직은 유아기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구출받아 갓 태어난 어린 아이와 같아서 약 2년 동안 광야 여정을 지나면서 찬양생활로 일관되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을 자꾸 드러내었습니다. 결국 그런 정도의 어린 신앙으로는 가난안을 정복하여 거룩한 신국건설의 성업을 감당하기에는 어림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런데서 우리는 유아기적인 신앙인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장성하지 못하고 유아기적인 시기에서는 찬송생활을 일관성있게 하지 못하고, 자구 불평과 원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조금 좋은 일이 있으면 좋아서 어쩔줄 모르고 찬송하되 악기를 동원하여 찬송하고 춤추면서 찬양하지만, 조금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크신 은혜를 베푸시면 잠간동안 찬양을 하며 굉장한 신앙이 있는 것 같은데, 조금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하나님을 떠나서 배도하는 것을 봅니다. 과거에 아니 조금 전에 받은바 크신 은혜도 쉽게 망각하여 버리고 지금 당면한 문제 앞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어린 아이들에게서 많이 있는 일입니다. 역시 유아기적인 신앙에서도 찬양생활로 일관되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원망과 불평하는 모습이 되풀이 되어 나타납니다.

이렇게 되풀이 되는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보아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종일관 어떠한 형평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으로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장성은 이런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시종일관하게 주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는 세속음악의 영향이 더욱 거세어지고 있는 이러한 때에, 그러한 세속음악에 거슬러 가면서 거룩한 노래를 하는 사람들의 편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대중음악 속에 있는 세속음악에 오염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 해야 하겠습니다. 세속음악과 거룩한 노래를 함께 부르는 것은 한 입에서 단물과 쓴물을 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우리의 입에서 거룩한 노래가 불러지고, 우리의 귀에도 거룩한 노래가 들려지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또 찬양하며 감사하며 줄거워할 때에 언제이고 금세 불평과 원망을 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에서 벗어나,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며 찬양하는 신실한 신앙으로 자라야 하겠습니다. 찬양생활로 진행하여 가는 가운데 때로는 원망이나 불평이 끼어들면, 아직도 자라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찬양의 생활로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한 입에서 쓴물과 단물이 날 수 없습니다.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려야할 입으로 원망하며 불평하며 저주하는 일이 없도록 장성하여 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종일관 찬양과 감사로 진행해 가는 인생의 여정이 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끝.

12

구약 이스라엘 교회의

성전 찬송의 시작과 중단

(대상 6:31-33, 39, 16:4-37, 대하 5:11-14, 에스라 3:10-13)

□ 복습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찬송의 하모니가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하모니가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타락한 천사의 꼬임에 빠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자기를 찬양하고 사탄을 찬양하는 길을 걷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하나님의 존전에서 쫓겨난 인생들 뿐만 아니라, 온 피조물까지도 탄식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감사와 찬양 대신에 탄식 가운데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인의 후예 가운데서 라멕과 그의 아들 유발을 통해서 타락한 세속음악이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그 심각성이 더해 왔습니다. 섹스와 폭력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세속음악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택하셔서 거룩한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셋의 후예 가운데서 에노스나 에녹이나 노아와 같은 이들을 택하셔서 줄곧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홍수 심판이후에 새 인류의 조상인 노아의 계열 셈을 택하셔서 또 계속해서 찬양을 받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서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유다 지파에게서 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찬양을 받게 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택하신 백성들을 통해서 거룩한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고 또 받으셨습니다.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타락한 세속 음악을 노래하고 즐기고 있을 때에 그 가운데서 당신의 백성들을 성별하여 내셔서 성별된 노래와 음악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과 같이 타락한 세속 음악의 큰 조류 속에서 성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마땅히 불러야할 거룩한 노래, 신령한 노래, 새노래, 즉 찬송을 불러야할 것입니다. 세속 음악을 즐기며 휩쓸려 떠내려가지 아니하고, 오직 거룩하고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점 한가지를 지난 시간에 생각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한 입에서 찬송과 원망을 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족장사까지는 거의 개별적인 찬양생활이었지만, 출애굽 이후에 공동체 속에서의 찬양생활이 나오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이후에 너무 기뻐서 춤을 추고 소고치며 찬양했지만, 불과 사흘이 지나 마라에서 쓴 물이 난다고 원망하였습니다. 얼마후 엘림에서 오아시스의 축복을 받았을 때에도 아마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감사와 찬양을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신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또 다시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그리고 르비딤에 이르러서도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아말렉의 공격을 무찔러 주심에 대해서 또 감사해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라고 외치면서 찬송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고 가데스바아네아에 이르렀을 때에 또 다시 원망을 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여보낸 정탐군들의 보고를 받고서 자기들을 여기까지 데려와서 처자식까지 다 그들의 밥이 되게 하려는 것이냐고 다시 원망하고 대들며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신국건설을 위한 사명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배회하면서 가치 없는 삶을 살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물론 가나안에 들어갔던 2세들이나 그후 사사시대의 세대들도 그러한 생활을 반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시적으로 임할 때에는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다가도, 조금 어려움이 있으면 원망하고 불평하며 하나님의 종에게 대드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통해서 성숙하지 못한 유아기적인 신앙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쉽게 불평하고 원망하고 저주하는 모습입니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찬송하는 것 같더니 금세 불평과 원망을 한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신앙생활의 유아기적 증상입니다. 장성하여서는 그러한 모습을 버리게 됩니다. 유아기적인 짓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두 가지 점에서 “한 입에서 쓴 물과 단물을 낼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 생각하였습니다. 어찌 세상의 음악을 즐기면서 찬송을 할 수 있으며, 찬송과 저주를 내겠습니까? 어찌 타락하고 오염된 음악을 즐기면서 거룩하고 신실한 찬양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세속음악을 즐기면서 온전히 찬송할 수 없습니다. 또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 어지 찬송할 수 있겠습니다. 쉽게 원망하고 찬송하는 유아기적인 모습을 버리고, 어떠한 형편 가운데서도 찬송하는 생활을 하는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야 할 것입니다(약 3:9-11 참고).

오늘은 구약 이스라엘 교회가 성전에서 공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드렸던 성전찬송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성전찬송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중단되었다가 다시 잠깐잠깐 회복되어 가다가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되고 포로로 끌려가 유수 생활하게 됨으로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피면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성전찬송의 시작과 계승

□ 성전찬송 규례 제정 직전의 역사적 배경 : 언약궤를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에 모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새 나라가 다윗 왕 때에 가서야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에 대한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잘 받았던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 공동체에 잘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방 나라들을 평정하고 통일왕국을 이루어 수도를 기브온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언약궤를 그곳으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변방 숲 속의 도시에 있던 언약궤를 무려 70년만에 이스라엘의 중심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운반하는 과정에서 아비나답의 자손인 웃사가 성급하게 법궤를 만진 결과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삼하 6:6). 이로 인하여 언약궤는 석달 동안 오벧에돔의 집에 머무른 뒤(삼하 6:11), 다윗이 친 장막에 마침내 안치(安置)되었습니다(삼하 6:17).

그 때 다윗은 너무 기뻐서 껑충껑충 뛰며 춤을 추면서(카라르)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미 우리가 생각한 바와 같이 그 때에 다윗의 아내 미갈이 그러한 모습을 보고 다윗을 업신여기며 욕했지만, 오히려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춤추는 것이 마땅하다고 조금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지만 단지 섭정 왕이었을 뿐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이스라엘의 중심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중심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이제 진정한 안식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⑴ 다윗 왕이 성전찬송의 규례를 제정함(대상 6:31-33, 39, 16:4-37, 25장).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평안하게 안치한 후에 다윗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대를 신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안식을 얻었기에 이제는 기뻐하며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찬양대와 찬양대장을 임명하고 찬양하는 사역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 앞에서 찬송하는 규례를 제정하였습니다. 다윗 왕에 의해서 이스라엘나라 안에는 그 공동체를 대표하여 하나님의 집 앞에서 매일 찬송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직분과 규례가 제정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대상 6장 31절-48절과 16장, 그리고 25장을 보면 그 내용이 있습니다.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다윗이 이 아래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전을 세울 때까지 저희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반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 직무를 행하는 자와 그 아들들이 이러하니 그핫의 자손 중에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 .... 헤만의 형제 아삽은 헤만의 우편에서 직무를 행하였으니 .... 저희의 형제 므라리의 자손 중 그 좌편에서 직무를 행하는 자는 에단이라(대상 6:31-33, 39, 44).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으니 그 두목은 아삽이요 다음은 스가랴와 여이엘과 스미라못과 여히엘과 맛디디아와 엘리압과 브나야와 오벧에돔과 여이엘이라 비파와 수금을 타고 아삽은 제금을 힘있게 치고 제사장 브나야와 야하시엘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부니라(대상16:4-6).

그 때 찬양대장으로 사무엘의 손자 헤만과 그의 오른 쪽에는 아삽과 왼쪽에는 에단(여두둔)을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각각 악기를 분담해 주었습니다. 아삽은 제금을 힘있게 치게 하였고, 또 다른 무리들은 비파와 수금을 타게 하였고, 제사장 브나야와 야히시엘은 나팔을 불게 했습니다. 이렇게 규례를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막에 안치하게 됨을 축하하여 찬양을 하게 했습니다.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헤만, 에단 : 여두둔)를 세워 우선 여호와께 감사 찬양을 하게 하였고,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화답하였습니다. 그 기사는 역대상 16:7-36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솔로몬의 성전으로 옮겨지기까지 다윗이 마련한 장막에 안치되었고, 찬양의 사역을 맡은 이들이 각 반열대로 그 회막 앞에서 매일 찬송하는 직무를 수행하게 했습니다.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머물러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되 ‘날마다’ 그 일대로 하게 하였고 ..... 제사장 사독과 그 형제 제사장들로 기브온 산당에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 모시게하여 항상 조석으로 번제단 위에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하여 이스라엘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게 하였고, 또 저희와 함께 헤만과 여두둔을 세워 나팔과 제금들과 하나님을 찬송하는 악기로 소리를 크게 내게 하였고 또 여두둔의 아들로 문을 지키게 하였더라(대상 16:37, 39, 40, 42).

그런데 아직 성막은 기브온 산당에 있었고, 언약궤만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기브온의 산당에 있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의식을 행하였고, 레위인들 중에서 찬양대의 직분을 맡은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언약궤 앞에서 그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여기 37절에 “항상 .... 섬기게 하되 날마다 그 일대로 하게 하였고” 라고 한 것을 보면, 일정한 규례를 따라서 규칙적으로 행하게 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안치된 이때로부터 시작해서 공적인 예배가 기틀을 잡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초로 예배모범이 탄생하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역대상 25장에 보면, 찬양대를 조직하는 과정이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이 군대장관들로 의논하여 성가대를 조직하였습니다. 여기서 ‘군대장관’은 성전 봉사하는 자들의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즉 성전을 위해 택정된 레위인들의 우두머리(사독, 아히멜렉)를 뜻합니다(대상 15:16, 24:3). 다윗이 만들었던 성가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입니다.

먼저 아삽은 선견자라고 불리웠고, 시편 중에서 12편의 시를 지었으며(대하29:30, 시 50:1, 23, 73:1-83:18), 노래에 뛰어난 자였습니다. 그리고 헤만은 고라 계통의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의 손자이기도 했습니다(6:33). 또 여두둔은 에단이라고 불리웠는데 단순히 선견자(대하 29:30)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특이할 만한 것은 밝혀져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의 이름과 관련된 시 몇 편이 있습니다(39, 62, 77편). 이들 세 사람은 이스라엘의 음악의 지도자로서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훌륭한 재질을 전수하였습니다(2-31절). 이들은 각각 아삽은 4명, 여두둔은 6명, 헤만은 1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가 자신의 아들들을 성전 성가대원으로 키웠습니다.

다윗이 선택했던 지도자급의 성가대원들은 288명이었으며(7절), 그 제자격인 성가대원들은 4000명이나 되었습니다(23:5). 이렇게 많은 식구를 가진 그 직임을 맡길 때 음악성과 인간적인 화합이 절실히 요청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직임을 맡길 때 인간적인 지위를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제비를 뽑는 방식으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공평함으로 그들을 대우한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찬양이라고 하더라도 부르는 자들의 마음이 분열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찬양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 직임을 구분하기 위해서 대표적으로 24명의 성가대원을 뽑았습니다(8-31). 그런데 그들의 명단 가운데 공통적으로 따라 다니는 문구는 무엇입니까?(9-31) ‘그 아들과 형제와 12인이요’ 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가족 공동체가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이들 12명 가운데 어떤 자들은 노래를 또는 악기 연주를 했을 것입니다(6절).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기능 속에 뚜렷한 공동체 의식이 살아 있을 때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찬양이 됩니다.

○ 언약궤를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모신 후에, 그 앞에서 찬양대원들로 하여금 매일 찬송하도록 규례를 정한 큰 뜻

이렇게 다윗이 언약궤를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모신 후에, 그 앞에서 찬양대를 조직하여 매일 찬송하도록 규례를 정하였던 것은 큰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특성은 하나님을 매일 찬양하며 사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상 때부터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셔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셔서 마침내 국가를 이루도록 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덕을 칭송하고 이방 나라를 향하여 선양하며 살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매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찬양대를 조직하여 매일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찬양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⑵ 솔로몬이 성전 봉헌후 성전찬양의 규례를 계승함(대하 5:11-14).

이렇게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의 회막으로 옮겨올 때부터 제정한 성가대 찬양의 규례에 따라서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될 때까지 찬양의 사역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솔로몬의 성전으로 언약궤가 안치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의 규례를 따라서 다시 성전에서 찬양을 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때에는 제사장들이 그 반차대로 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정결케 하고 성소에 있다가 나오매, 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단 동편에 서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또 나팔 부는 제사장 일백 이십인이 함께 서 있다가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대하 5:11-14).

본래 다윗이 제사장들로 하여금 성전에서 섬기게 하는 규례를 제정할 때는, 제사장들을 24 반열로 나누어서 각 반열은 해마다 2 주간씩 성전에서 섬기도록 하였습니다(대하 24:19). 이처럼 제사장들의 성전 봉사가 1년 48주(週)로 나누어서 수행되었던 것은 그들의 직무를 효율적으로 감당키 위한 제도적 조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조정은 포로기 이후 다시 제정되었고, 신약시대까지 계속되었습니다(눅 1:5 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순서를 따르지 아니하고 모든 제사장이 한 번에 정결케 하고 함께 봉사했습니다. 그 이유는 의식이 너무 크고 또 많은 인원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제사장들의 순번을 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겨 봉헌식을 한 이후, 솔로몬 왕은 그의 부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따랐던 하나님의 인도를 계승하여 제사장들의 반차를 정하여 매일 성전에서 찬양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24 반열로 나누인 찬양대원들 각 반열이 일년에 두 주간씩 반차를 따라 찬양함으로 매일 성전 찬송이 드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또 그 부친 다윗의 정규를 좇아 제사장들의 반차를 정하여 섬기게 하고 레위 사람에게도 그 직분을 맡겨 매일에 합의한대로 찬송하며 제사장들 앞에서 수종들게 하며 또 문지기로 그 반차를 좇아 각 문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전에 이렇게 명하였음이라!(대하 8:14).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해서 찬양대원들에 의해서 성전에서 매일 찬송이 드려진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하여 내신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며 살도록 하심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솔로몬 때에 찬양대원들에 의해서만 성전에서 찬양이 드려진 것이 아니고, 실지 이스라엘 나라는 이방 나라로 하여금 하나님을 송축하는 제사장 나라로서 사명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와 부귀를 듣고 방문하여 찬사를 보내는 내용 가운데서 그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왕께 고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당신의 지혜가 크다 한 말이 그 절반도 못 되니 당신은 내가 들은 소문보다 지나도다.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시고 그 위에 올리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왕이 되게 하셨도다 당신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려고 당신을 세워 저희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대하 9:5-8).

마치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날 저녁에 제자들을 위해서 대제사장으로서 기도하시는 내용 가운데 제자들을 통해서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믿게 되기를 구하심으로 교회 공동체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방 나라의 여왕으로 하여금 보고 하나님을 송축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한 직후 이스라엘 나라는 찬양대원들에 의해서만 매일 성전 앞에서 찬양을 드린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지 이방 나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서 하나님을 송축하도록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찬양대원들이 드리는 성전찬송은 단지 의식에 그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나라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양하는 찬송의 실질이 있어서 드려졌던 것입니다.

2. 성전찬양의 중단과 일시적인 회복

⑴ 솔로몬의 치적 말기에 찬송의 실질이 상실되기 시작하여 성전찬송도 중단되기 시작함

그러나 솔로몬의 치적 말기에 가서는 정책결혼으로 들여온 이방 여인들로 인하여 우상숭배를 허용하여 많은 산당이 세워지고 하나님께만 드려야할 찬양을 오히려 우상에게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성전에서 드리는 찬양을 중단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전에서 찬양대원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찬양이 실지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섬기는 실질이 없이 형식으로만 드려지는 찬양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다가 르호보암 때에는 나라가 둘로 나뉘어 겨우 두 지파만 예루살렘 성전에 왕래할 수 있었으며, 나머지 열 지파는 왕래할 수 없게 되어 성전찬송과는 무관한 백성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까지도 성전찬송이 드려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나라로서 존재의 성격을 상실하게 되었고, 자연히 성전찬송도 계속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유다의 12대 왕인 히스기야의 부친 아하스 왕은 시종일관 악정을 계속하는 가운데 급기야는 성전 문을 닫고 백성들이 여호와께 제사드리는 일마저 금지시켜 버렸습니다(대하 28:24). 그리하여 성전찬송도 중단되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⑵ 히스기야 왕때 성전찬송이 잠깐 드려짐(대하 29:25-30, 대하 31:2)

그러나 아들 히스기야는 즉위하자 제일 먼저 그 성전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대하 29:3). 히스기야는 성전 일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성전 동쪽 문 앞, 즉, 성전 기지밖에 있는 광장으로 소집하여 자신을 성결케 하고, 성전을 정화하게 하고, 성전에서 속죄제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그 속죄제를 드릴 때 악기와 시로 찬송케 하였습니다(25-28절). 이렇게 중단되었던 성전찬송이 히스기야 왕의 예배 제도 개혁으로 다시 드려지게 된 것입니다.

왕이 레위 사람을 여호와의 전에 두어서 다윗과 왕의 선견자 갓과 선지자 나단의 명한대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게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선지자들로 이렇게 명하셨음이라. 레위 사람은 다윗의 악기를 잡고 제사장은 나팔을 잡고 서매 히스기야가 명하여 번제를 단에 드릴 새 번제 드리기를 시작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시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악기를 울리고 온 회중이 경배하며 노래하는 자들은 노래하고 나팔 부는 자들은 나팔을 불어 번제를 마치기까지 이르니라. 제사 드리기를 마치매 왕과 그 함께 있는 자가 다 엎드려 경배하니라. 히스기야왕이 귀인들로 더불어 레위 사람을 명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저희가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경배하니라!(대하 29:25-30).

⑶ 히스기야 사후 다시 성전찬송이 중단됨

그러나 다시 성전찬송이 드려진 것은 히스기야의 살아있을 동안 뿐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죽은 즉시 그의 아들 므낫세와 유다 백성들은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성전에 까지도 단들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두시겠다고 하신 성전에 오히려 우상을 세운 것입니다. 성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단을 쌓고, 힌놈의 골짜기에서 그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고,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진노를 격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장관들로 와서 치게 하시고,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을 때에야 므낫세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겸비하여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거하게 하셨고, 므낫세가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고, 성전과 예루살렘에 세운 우상과 산당들을 다 성밖에 던지고, 하나님의 단을 중수하고 화목제와 감사제를 드리고 유다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섬기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여호와께만 제사를 드리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는 백성들도 있었습니다. 더욱이 므낫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아몬이 왕이 되어서는 다시 므낫세가 만들었던 모든 우상에게 제사하며 섬겼습니다. 아몬 왕은 반역한 신복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였고, 국민이 그 반역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 아들 요시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았습니다.

⑷ 요시야 왕때에 잠깐 성전찬송이 드려짐(대하 35:15)

요시야는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8년 후인 16세에 비로소 다윗의 하나님을 구하고, 왕이 된지 12년 후인 20세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케하여 그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렸습니다.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그 단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을 찍고,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거기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제사장들의 뼈를 단위에서 불살라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였습니다. 그렇게 6년 동안 유다 땅과 전을 정결케 하기를 마치고, 성전을 수리하게 하였습니다(1-8절). 성전의 연보궤에서 연보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였습니다(14절). 요시야 왕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을 불러모으고, 그들 앞에 율법을 낭독하고 언약을 갱신하였습니다(29-30절).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그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겠다고 언약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중단되었던 유월절 행사를 부활시켰습니다. 요시야는 다윗이나 솔로몬, 또는 여호사밧 만큼 많은 재산을 갖고 있지 못했으나, 그 어느 왕보다도 정성스럽게 스스로의 재물을 바쳐 회중들이 모두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시야의 유월절은 사무엘 시대이후 시행된 모든 유월절 제사보다 가장 탁월하였던 것입니다(18절). 이렇게 해서 성전찬송도 다시 부활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삽의 자손 노래하는 자들은 다윗과 아삽과 헤만과 왕의 선견자 여두둔의 명한대로 자기 처소에 있고 문지기들은 각 문에 있고 그 직임에서 떠날 것이 없었으니 이는 그 형제 레위 사람들이 저희를 위하여 예비하였음이더라(대하 35:15).

⑸ 요시야 사후 또 성전찬송이 중단됨

그러나 그들의 언약은 요시야 왕이 살아있는 날 동안만 지켰을 분이었고, 요시야가 죽자 곧바로 백성들은 우상숭배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로 보건대 요시야 왕은 성실하게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였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은 여전히 우상에 집착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 사업이 지도자에 의해 훌륭히 계획되어 잘 수행되었어도 그 후대에 백성들에게 잘 계승되어 지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시야가 죽은 후 그 찬란하던 종교적 광명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마침내 유다 왕국이 멸망을 맞이하게 됩니다. 요시야를 뒤를 이은 네 왕은 다같이 이방 왕들에 의해 수모를 당했고, 또 불과 23년만에 나라가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성경.C 586년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전도 훼파되고 더 이상 성전찬송을 올려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⑹ 바벨론 포로 기간에는 성전찬송을 드릴 수 없게 됨(시 137:1-4, 애 1:6-8)

그러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이 거기서 어떻게 지냈을까요? 우리는 그 정경을 시편 137편과 예레미야 애가 1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시 137:1-6).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저의 목백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이 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림 같도다. 예루살렘이 환난과 군박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 백성이 대적의 손에 빠지나 돕는 자가 없고 대적은 보고 그 황적함을 비웃도다!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불결한 자 같이 되니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 그 적신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저가 탄식하며 물러가도다!(애 1:6-8).

바벨론 포로로 잡혀와 속박과 고통을 겪고 있던 백성들 가운데 신실한 자들은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오, 즉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진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울었습니다. 자신들의 불의와 불순종을 깨닫고 과거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드렸던 예배와 영광과 만족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령한 노래와 연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는 직무를 맡았던 레위인들은 대적에 의해 모든 재산을 빼앗겼을 때도 수금과 같은 자신들의 악기는 귀한 세간의 일부로 보존하여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수금을 연주하지 않고 버드나무에 걸어 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벨론의 압제자들이 하나님께만 돌려 드려야할 시온의 노래를 자기들에게 들려 달라고 조롱하였기 때문에, 유다 백성들이 절대로 그들에게 찬양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조소에 찬 압제자의 요청에 대해서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하고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예배 때와 종교 행사 때에 하나님을 향해서 불러야할 여호와의 노래를 이방인의 유흥과 쾌락의 도구로 사용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더 나아가 그 행동은 백성들이 지금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로서 애통과 애곡의 때임을 자각하고, 수금을 다시 사용할 때가 오기를 열망하였음을 나타냅니다. 5-6절에 그러한 그들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잊어버리고 바벨론의 압제자들을 기쁘게 하여 그들의 우상을 찬양하기 위하여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면 영원히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를 수 없는 무능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기원은 예루살렘, 즉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을 부르는 거룩한 성전에 대해 생각을 결코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잊어버리거나 지워버리지 않겠다는 엄숙한 맹세인 것입니다.

이렇게 바벨론의 압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고 하여 하나님을 조롱하며, 불행에 처한 자들을 모욕하여 더욱더 괴로움을 더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바벨론의 포로 기간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에 높이던 모든 이방 나라로부터 비웃음거리가 되고, 업신여김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게 해야 할 이스라엘은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며 무시하게 하는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만한 위치에서 떨어져 이방인들로부터 비웃음과 업신여김을 당하는 자신들의 처지와 죄악을 생각하며, 바벨론의 여러 강가에서 울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버드나무에 걸어 놓은 수금을 가지고 성전이 있는 시온에 돌아가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는 알이 오기만을 열망하였습니다.


맺는 말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찬양대가 매일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찬양하게 하는 규례는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매일 하나님께 찬양하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려는 목적에서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다윗이 제정한 성전찬송의 규례로부터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성도들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날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생활이라는 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상 섬기는 직분을 맡았던 그 찬양대원들과 같이,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삶을 사는 레위인들이요, 제사장들이요, 찬양대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앞(중심)에 모시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찬송하는 생활은 성도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이스라엘이 매일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생활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떠나서 죄악 가운데서 살아갈 때에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며, 하나님의 이름도 더럽히는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실질이 있어질 것이요, 하나님을 떠나서 죄악 가운데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움으로 찬양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지 못하고, 저 한 모퉁이에 계시도록 하는 삶 가운데서는 찬송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불평과 원망과 저주가 있게 됩니다. 이방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업신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에 날마다 찬송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윗의 개인 생애를 보아도 그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았기에 날마다 찬양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목동시절부터 장군시절을 거쳐 왕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았기에 늘 찬송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소년시절에는 들에서 양치면서 찬양하였고, 장군시절에는 전쟁터에서 찬양하였고, 왕이 되어서는 찬양대를 임명하여 날마다 성전에서 찬양하도록 규례를 제정하였고, 그들이 부를 찬양의 시와 곡까지도 지어주었습니다. 다윗은 최초의 성가대 창설자요. 최초로 성전찬송의 규례, 즉 예배 찬송의 모범을 제정한자요, 찬송가를 지은자였습니다. 다윗과 같은 재능은 없어서 새로운 찬송을 작사, 작곡하여 부를 수는 없어도 이미 만들어진 신령한 찬송으로 끊임없이 찬양하며,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덕을 선양하고 송축하는 실질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13

구약 이스라엘 교회의

성전 찬송의 회복과 중단

(대상 6:31-33, 39, 16:4-37, 대하 5:11-14, 에스라 3:10-13)

다윗 왕이 큰 목적을 가지고 제정한 성전찬양의 규례와 거기에 담긴 정신이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잘 지켜지지 아니하고 중단되다가 간혹 일시적으로 다시 회복되는 듯 하지만 다시 중단되고 하는 일들이 반복되는 가운데 결국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려고 해도 더 이상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지 아니하고 떠나서 죄악된 삶을 살아갈 때 성전찬송은 중단되었고, 다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려는 민족적인 갱신운동이 일어날 때에는 일시적으로 성전찬송의 규례와 그 규례와 그 정신이 회복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성전이 훼파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땅에서 쫓겨나 더 이상 하나님께 찬송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할 시온의 찬송을 이방인들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서 들려 달라는 조소를 받기도 하고 모진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에야 그들은 바벨론의 여러 강가에서 과거의 죄악을 회개하며 크게 울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예루살렘의 성전에 돌아가 다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성전 앞에서 찬양할 수 있기를 열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을 맞은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지 아니하고 떠나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 삶인가 하는 것을 뼈아프게 체험하고, 이제야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던 때를 회고하며 그때가 복되었던 것을 체득(體得)하게 된 것입니다.

1. 성전찬송의 회복과 중단

⑴ 제1차 귀환후 스룹바벨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드린 성전찬양(에스라 3:10-13)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들의 눈물을 모른체 하시지 않고 예루살렘에 돌아갈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바벨론 시대가 지나고 메대 바사의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성전도 재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대하 36-22-23, 에스라 1:1-4), 포로로 잡혀간지 70년만에 스룹바벨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으로 제 1차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게 됩니다. 성전 제건을 시작할 때 감격하며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는 정경(情景)이 에스라서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건축자가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 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스 3:10-13).

성전 지대가 놓이는 순간, 바벨론 강가에서 시온에 있는 성전에 돌아가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하기를 원했던 이들이 버드나무에 걸어 놓았던 수금을 가지고 돌아와 악기를 연주하며 찬송하게 됩니다.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다윗의 규례대로 하호와의 인자하심에 감사하며찬송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함께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첫 성전을 보았던 여러 노인들은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크게 울었던 이유는 다시는 하나님의 전을 보지 못하고 언약의 백성으로서 수치 중에 죽을 수밖에 없는데 다시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인 성전의 지대가 놓여지므로 하나님의 은헤에 감격하였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그동안 끊겼던 성전찬송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회복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⑵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성의 회복과 봉헌으로 성전찬양도 회복됨

그 이후로 예루살렘의 성곽이 낙성되어서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정식으로 노래하는 자들이 다 모이게 되고, 그들은 예루살렘의 사방의 동네를 세워서 예루살렘 성곽의 주위에 거하면서 다시 찬양하는 일을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 12장 27절 이하의 말씀을 보시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동네에서 모여 오고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웹 들에서 모여 왔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를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동네를 세웠음이라!(느12:27-29).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 성 위로 항렬을 지어 가게 하는데 한 떼는 우편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하니 ..... 감사 찬송하는 다른 떼는 저희를 마주 진행하는데 .... 이에 감사 찬송하는 두 떼와 나와 민장의 절반은 하나님의 전에 섰고 ......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느 12:31-42).

.....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의 명을 좇아 행하였으니, 옛적 다윗과 아삽의 때에는 노래하는 자의 두목이 있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것을 주되 그 구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구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느 12:45-47).

느헤미야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이 재건되어서 견고하게 되었을 때 비로서 찬양대의 임무가 회복되어, 이스라엘 자손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찬양하는 일을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이 회복됨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나라에 찬양하는 생활도 회복된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와 같지 않지만,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이 이스라엘에 회복되었습니다.

⑶ 다시 얼마 못가서 찬양생활을 잃어버림(슥 11:5)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얼마 못가서 찬양생활을 잃었습니다. 이스라엘은 70년 포로에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양대의 사역을 다시 하게 하여 찬양생활이 회복되는 듯 했지만, 얼마가지 못해서 다시 하나님을 떠나서 온갖 죄악과 배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야하고 경배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다시 찬양생활을 상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러한 형편을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지적하시면서, 장차 예루살렘이 다시 멸망하게 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스가랴 11장 3절 말씀부터 보시지요.

..... 목자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그 영화로운 것이 훼멸되었음이로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황무하였음이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떼를 먹이라. 산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슥 11:3-6).

여기서 양떼를 ‘산 자들’은 예루살렘에 침공한 로마인들을 가리키고, ‘판 자들’과 ‘목자들’은 유다의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양떼들을 로마인들에게 팔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거짓 목자들로써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양떼들을 착취하였고, 마침내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게 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부요케 된 것을 인하여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고 합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찬송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 것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양떼를 팔아서 자기들의 이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쯤 되면 이스라엘 나라 안에는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없게 되었다는 애기가 아니겠습니까? 느헤미야 때에 찬양생활이 회복되는 듯 하더니 불과 얼마 가지 못해서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을 잃고 배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귀중한 교훈 한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건실한 신앙이 있을 때에야 찬양하는 생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이 타락하게 되면 찬양생활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삶의 기준에 모시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요,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삶입니다.

2. 계속되는 신실한 남은 자들의 찬양

이렇게 해서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통해서는 찬양 받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 신실한 남은자들을 통해서 계속 찬양을 받아 오셨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의 대다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지 않았지만, 신실한 남은 자들은 그러한 대세 가운데서도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주님을 뵙고 찬양하였던 이들의 모습 속에서 보게 됩니다. 신약 성경에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뵙고 찬양하였던 세 사람의 찬양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① 마리아의 찬양(눅 1:46-55)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46-55).

마리아가 부른 이 찬송을 가리켜 ?마그니피카트?라고 하는데, 그 유례는 라틴어 성서의 첫 글자에서 따왔습니다. 이 찬양의 첫 글자가 ‘찬양한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찬양한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서 ?메갈뤼노?(μεγαλυνω)로 되어 있는데, 라틴어로는 ?마그니피카트?(Magnificat)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뜻은 물론 ‘찬양하다’ ‘훌륭한게 만들다(선언하다)’ ‘웅장하다’ 인데, 그 뉴앙스를 살리면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찬양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49절에서는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라고 찬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처녀인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분을 잉태하게 되었다고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찬양은 평소에 늘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신뢰하며 칭송하는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② 사가랴의 찬양(눅 1:68-79)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 (눅 1:68-71).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부른 이 찬송은 ?베네딕투스? 라고 부릅니다. 이 또한 라틴어의 첫 글자인 ‘찬송하리로다’를 따서 부른 이름입니다. 여기서 ‘찬송하리로다’ 의 원문 ?율로게토스? (ευλογηιος)로 되어 있는데, 그 뜻은 ‘찬양받을 만한’ ‘축복받은’ 입니다. 그러니까 사가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의 뿔을 일으키신 것에 대해서 찬양 받을 만한 분이라고 송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시므온의 찬양(눅 2:29-32)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29-32).

시므온의 찬양은 ‘주재여 이제는’ 으로 시작되기에 라틴어를 따서 ?능크 디 미티스?(Nunc Dimittis)라고 부릅니다. 이 또한 라틴어의 두 글자들 따서 붙인 제목입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그가 성전에 들어갔다가 아기 예수님을 만나 뵙고서 하나님께 올리는 감사의 찬양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마리아나 사가랴나 시므온과 같이 신실한 남은 자들은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고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신실한 남은 자들의 입술과 거룩한 삶을 통해서 계속 찬양을 받아 오셨습니다. 물론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을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극히 소수의 신실하게 남은 자들만이 요소 요소에 흩어져서 주님을 찬양하며 살았습니다.


맺는 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 모두가 함게 올려드리는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백성들이 다같이 하나님을 그들의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면서 거룩한ㅇ 사회를 이루어 그 사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영광이 이방인에까지 선양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네서 구원해 내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목적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면서 거룩한 사회를 이루어 그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품성들이 드러내고, 하나님의 은덕이 선양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떠나서 죄인됨 삶을 살아갔기에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바벨론에서 고통을 당하고서야 자기들의 죄악을 뉘우치고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인자를 베푸셔서 예루살렘으로 규환하여 성전과 성을 재건하시고 다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거룩한 사회를 이루며 하나님께 찬양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떠나 죄악 가운데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통해서는 찬양 받을 수 없게 되었지만, 계속해서 신실한 남은 자들을 통해서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얻은 두 가지의 교훈을 꼭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게 모여서 거룩한 사회를 이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은덕을 선양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회가 아니라면, 그 사회는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존재의 성격을 상실한 것이요, 결국 존재의 의의가 없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의 교우들도 이러한 사실을 뚜렷이 인식하시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성도들이 더불어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어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은덕을 기리고 선양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은덕이 선양되지 않는다면, 교회로서의 성격을 상실한 것이요, 존재의 가치나 의의를 상실한 상태라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자신이 속하여 있는 사회나 교회가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지 않고 떠나서 찬송하는 생활을 하지 아니할찌라도, 자신이라도 신실한 남은 자로서 찬양하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원망과 불평이 풍미한 사회 가운데 처하여 있다 해도 자심만은 감사와 찬양의 정서를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을 찬야하는 삶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인생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낭비하고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재의 가치나 의의를 살싱한 상태임을 직시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큰 교훈을 마음 가운데 아로 새겨서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자신을 늘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데서 인생의 가치와 의의가 가장 잘 드러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십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원하는 것입니다!(소요리 제 1문답).

14

예수님 안에서 회복된

신약 초대교회의 회중찬송

(엡 5:18-19, 골 3:16-1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의 거룩한 사회를 이루어 하나님의 은덕과 거룩한 품성을 선양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구원해 내셨는데, 더 이상 이스라엘 공동체를 통해서는 찬양을 받을 수 없게 되었지만, 계속해서 신실한 남은 자들을 통해서라도 찬송을 받으셨습니다.

1. 예수 안에서 회복된 찬송의 생활

그러나 하나님의 본의는 단지 몇 사람의 남은 자들이 각각 흩어져서 드리는 찬양을 받기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거룩한 사회를 이루어 가면서 공동으로 드리는 찬양을 원하셨습니다. 각자가 흩어져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도록 하시기 위함에 그치지 아니하고, 긍극적으로 함께 모여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이 들어나고 하나님의 은덕을 기리는 사회를 이룸으로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다시 회중들을 통해서 찬양을 받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잃어버린 찬양생활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1장 3절 이하에서 그 두가지를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5-6).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2).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늘 개인의 차원에서 혼자만 주님을 잘 섬기고 거룩한 생활을 하면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신실하고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품성을 선양하여야 하겠지만, 더욱 교회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거룩한 사회를 이루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으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은혜 베푸시는 사실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보다, 함게 모여 품성을 주고 받으며 서로 은혜를 베푸는 사회 속에서 더욱 충일(充溢)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오셨을 때에 소경이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간구하여 눈을 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좇는 것을 보고 있던 백성들이 다 하나님을 찬양한 일이 있습니다(눅 18:43).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눅 19:37-38).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을 보았던 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송축하였습니다(눅 24:53).

사도행전 2:47에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최초로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 안에 찬송이 울려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이기를 힘쓰고 말씀을 가르침 받고, 교제하고, 기도하며, 특히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4:26에도 보면,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찬양이 울려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에베소서 5:28-19과 골로새서 3:15-16을 보면, 에베소 교회나 골로새 교회에서도 찬송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도 찬송이 있었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이제 예수님 안에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동으로 모여 하나의 사회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다양한 멜로디를 하나로 모아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 공동으로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로 찬양을 드리며 사는 사회가 회복되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2. 초대교회의 회중찬송

이제 초대교회에서 불렀던 회중 찬송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에베소서 5:18-19과 골로새서 3:15-16에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초대교회에서 불렀던 찬송들에게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지 생각하겠습니다. 이 양쪽 구절 모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라는 표현이 공통으로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해지고 있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세 가지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하여 지금까지 여러모로 해석을 시도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 중에서 일반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바에 의하면 ‘시’는 구약성서에 있는 시편을, ‘찬미’는 시편 이외에 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찬미의 노래를, 그리고 ‘신령한 노래’는 새로운 노래로서 특히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찬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세 가지 말로 표현되고 있는 찬미의 노래가 신약시대, 초기의 기독교회 시대에 실제로 사용된 것을 바탕으로 해서, 교회에서의 찬송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⑴ 시(시편, 찬송가의 원류)

① 시편의 형성과 전승

여기서 ‘시’는 ?프살모스?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성경 중에서 ?미조모르?로 되어 있는 시편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악기의 연주에 맞춰서 부르던 찬송시입니다. 이 구약성경에 있는 150편의 찬송시들은 주로 다윗 왕이 성전 찬양대를 조직하고 규례들을 정하여 날마다 성전 앞에서 찬송하는 사역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지은 노래들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다른 사람이 지은 곡이 들어있고, 익명으로 되어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어떻든 구약 이스라엘 교회가 성전에서 공적인 예배 때에나 사람들의 공사 생활 중에 노래되어 지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로 계승되어진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현재 우리가 성경과 찬송가를 가지고 예배드리는 것처럼, 율법과 예언서 및 시편으로써 신앙생활과 예배를 드려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이들 “율법(모세)과 예언서” 그리고 특히 “시편(또는 다윗)”에 관해 언급하고 있으며, 실제로 인용하고 있는 대목을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인용이 가장 많아서 500회가 넘고, 그 다음으로 시편으로부터는 454회 인용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유대교에 있어서의 성전예배, 회당예배, 그리고 가정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종교의식, 신앙의 행위 속에서 살아있던 것이 예수님 자신의 삶 속에서도 전승되어, 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뒤에 생겨난 그리스도 교회 안에 계속 살아있게 된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② 시편의 낭독과 가창법

그런데 이 시편이 본래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떻게 낭독되고 가창되었고,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기독교에 그대로 전승되었는지에 관하여 확실한 것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찬송가 학자들에 의해서 후대에 기독교 안에서는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낭독하거나 가창되었습니다.


㉠ 우선 시편의 본문 그 자체를 회중 전체가 노래하는 형태입니다. 그것은 시편의 본문 자체가 히브리어 원문에 있어서, 그 내용이나 어법에 알맞는 운율을 지니고 있는 사실을 좇아 노래 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쥬네브 시편가? 라 불리우는 것이 여기 속하는데, 시편 본문을 가능한 한 그대로를 운율화 하여 회중가로 만들려 한 것입니다.

일반 교인들이 가창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운율화와 그 내용의 뜻에 바탕을 두고, 신약 또는 기독교적인 표현을 채택하여 의역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루터에 의해 시작된 독일의 회중찬가(코랄) 중 오래된 것 가운데 그런 예가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시편 제 46편을 대본으로 삼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입니다.


㉡ 다음으로는 시편의 본문을 낭독 또는 가창하는 것을 듣고 음미하려 하는 형태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시 오래 전부터 있는 형태인데, 동방 정교회에 전승되고 있는 “성영(聖詠)” 이나, 서방 카톨릭 교회에서 중세 이래로 확립된 그레고리오 성가조(그레고리안 찬트)의 시편 가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성영이나 그레고리안 찬트는 일반 교인이 부르기는 불가능한 노릇이어서, 훈련된 독창가든가 성가대에 의해 가창되었습니다.


㉢ 또한 시편의 내용과 형태가 지닌 가장 특징 있는 평행시형과 거기에 바탕을 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교창 또는 응답송의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이렇게 교창의 형태를 갖추고 시편에 바탕을 둔 노래는 종래의 우리의 찬송가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그 원형을 찬송가에 부록되어 있는 교독문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교독문에 수록되어 있는 시편은 거의 평행시형을 교독하는 형태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⑵ 찬미(예배의 기본적인 찬송가)

이것은 시편 이외의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찬미의 노래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노래를 찾아 보면 다음과 같은 노래들이 있습니다.

① 구약성경에 나오는 노래들

모세의 노래(출 15장, 신 32장), 하나의 기도 (삼상 2장), 하박국의 기도(합 3장), 이사야의 기도(사 26장), 시온 귀환의 노래(사 35장), 히스기야의 노래(사 38장), 주의 종의 노래 1(사 42:1-4), 주의 종의 노래 2(사 49:1-6), 주의 종의 노래 (사 50:4-11), 주의 종의 노래 4(사 52:13-53:12), 요나의 기도(욘 2장), 기타(대상 16:7-36, 대하 5:13).

② 신악성경에 나오는 노래들

사가랴의 노래(눅 1:67-79), 마리아의 노래(눅 1:46-55, “Magnificat”), 천사의 노래(눅 2:14, 영광송), 시므온의 노래(눅 2:29-31, “Nunc Dimittis”).

③ 초대교회의 통상문(Ordinarium)

㉠ 긍휼의 찬가(키리에 엘레이손, Kyrie Eleison, “주여! 긍휼이 여기소서!”)

예배의 도입부에서 “주여 긍휼히 여기소서!” 란 말을 반복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비는 노래입니다. 키리에 엘레이손(주여! 긍휼이 여기소서!)의 그리스어의 표현은, 신약성경 중에서 예수님을 향해 한 말(마 20:30, 15:22등)을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모름지기 교회에서는 아주 초기부터 사용되던 예배용 구절로서, 라틴어로 바귄 카톨릭의 미사에서나 종교 개혁에 의한 루터의 독일어 미사에서도 라틴어니 독일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리스어 그대로 음역하여 계속 노래해 오던 것입니다.

㉡ 영광의 찬가(글로리아, Gloria)

역시 예배의 도입부에서 노래되는 것으로서, 그 원인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탄생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이라는 그리스도 탄생의 밤에 부른 천사들의 노래로 시작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의 노래입니다.

㉢ 신앙고백(신앙 선언, 신조, 크레도, Credo)

성서 낭독과 거기에 바탕을 둔 설교를 내용으로 한 말씀의 전례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서 사도신경 또는 니케야 신조의 말씀의 낭독과 또는 가창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물론 성서의 메시지에 바탕을 두고 교리적인 발전에 따라 초대교회에서 이미 멋지게 형성된 것입니다.

㉣ 영창(하나님께 영광의 찬미, 상투스, Sanctus)

신악고백이 허용된 신자들이 참여하는 성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자 이사야가 소명을 받을 대 성전에서 세라빔이 노래하는 것을 들은 노래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이 노래는 그 위에도 계속해서 노래 불리어져 신약시대에도(계 4:8), 그리고 교회역사를 일관하여 찬송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사용하는 예배 찬송에는 “성삼위송”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 평화의 찬가(아뉴스 데이, Agnus Dei)

역시 성찬에 참여하는데 관련된 노래입니다. 그리스도를 가리켜 “죄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니므이 어린 양” 이라고 고백 찬미하는 일은 신약시대에 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요 1:29, 35, 계 5:12, 13, 7:10 등). 그리고 “신령한 노래” 와 관계 됩니다.


이상의 통상적인 장르 외에 초대교회에서 사용된 찬송의 장르로서 ?봉헌송?(오페르토리움, Offertorium)과 ?성체 배령송?(콤뮤니오, Communio)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기도?는 초대교회 이래로 예배에 있어서의 통상적인 기도였습니다!

⑶ 신령한 노래 - 새로운 노래, 그리스도 찬가

① 빌 2:6-11

② 딤전 3:16

③ 히 1:3-4

④ 벧전 2:1 후반 - 25절

⑤ 계 5:9-10, 13


맺는 말

이상의 고찰에서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예배시에 사용한 찬미와 신령한 노래 사이에는 어느 정도 구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찬송과 복음송의 차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예배시에는 예배에 합당한 찬송의 장르를 선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복음송은 평소에 개인적으로는 몇 사람이 신령한 노래로 부를 수 있겠지만, 예배찬송으로는 합당치 않습니다.

□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복음송도 필요치 않고, 세속노래도 없고, 온전히 예배찬송만 드리게 될 것입니다!

장차 주님의 나라에 가서는 구태여 복음송이 필요없고, 모두 예배 찬송만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예배시에 예배찬송으로 합당한 찬송을 선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또 지금 이 땅에서는 세속노래와 찬송이 병행하여 불려지고 있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면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만 불려질 것입니다. 아름다운 하모니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날이 올때까지 우리는 이땅에서부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속노래에 빠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시에는 예배에 합당한 찬송을 드리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15

세속 노래의 해악

그 이해와 교회의 대처

(창 4:23-26, 롬 12:2, 벧전 1:14-15)

지금까지 우리는 처음 창조된 에덴동산에서으로부터 시작해서 장차 새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기까지 찬야의 역사에 대해서 살폈습니다. 우리는 지금 찬양하는 생활과 세속 노래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기까지는 끊임없이 세속 노래가 우리를 유혹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거센 세속 노래의 물결 속에서 새 노래를 부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세속 노래가 우리에게 끼치는 폐해(弊害)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처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1. 세속 노래가 끼치는 해악

우리가 길을 가고 있을 때나 휴식을 취할 때나 거의 어김없이 음악을 접하게 됩니다. 버스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청소년들의 귀애 이어폰을 꽂고 있지 않은 경우가 들물 정도인데 그들이 듣는 음악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다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우리의 고막을 진동시키는 것은 어떤 음악일까요? 거의 대부분이 타락한 록음악(Rock music)이나 대중음악(Pop music)임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T.V의 광고음악, 영화음악, 시그널뮤직이건 쇼프로그램의 음악이건 에어로빅의 음악이건 거의 록음악임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락의 현장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대중음악이 영혼에 끼치는 해악은 실로 가공할만 합니다. 특히 록음악은 섹스, 마약, 신성모독, 폭력, 파괴, 살상 등에 찌들어 우리에게 많은 해약을 끼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오염시키고, 온갖 죄악의 충동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랩음악?의 경우도 폭력을 조장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제 세소음악이 우리의 영혼에 끼치는 해악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사실은 저도 세속음악이 우리의 영혼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분야에 책을 보면서 참으로 경악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큰 해악을 끼치는 세속음악에 대해서 너무도 무지하여, 성도들을 세속음악의 해악 가운데 방치해 두고 있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속음악이 끼치는 해악을 생각해 봅시다.

⑴ 대중음악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록음악의 실상

우선 대중음악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록음악의 실상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록음악이 태동한 것은 1950년도 중반입니다. 흑인들의 음악인 리듬앤 블루스에서 리듬을 백인들의 켄트리 음악에서 연주기법을 원용한 새로운 기법의 음악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로큰 롤?입니다. 로클론은 "Rock’n Roll"(Rock 그리고 Roll)로 쓸 수 있는데 ‘Rock’은 남자의 성기, ‘Roll’은 “굴러다닌다”는 속어로서 양자를 합치면 ‘차 안에서 행하는 섹스’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가 성행위를 나타내는 은어입니다. 또 달리 ‘Rock’은 “반석(교회)”, ‘Roll’은 “흔들다”라고 해서 교회를 타락시킨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 이전에 미국의 대중음악(팝음악)은 애정묘사나 성적인 면에 있어서 결코 직설적인 표현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해 팝(대중)음악에는 반(反) 사회적 내용과 노골적 성적관계를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록음악은 신성모독, 섹스 조장, 마약과의 관계 등의 특징을 가집니다.

① 신성모독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록음악의 내용 가운데 가장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기독교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으면서 사실은 신성모독하는 내용이 담겨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젊은이들이 가사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그리고 그 곡의 어떠한 의도에서 어떤 사상적인 배경적인 사상하에서 불려지고 있는지도 모르고서 그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멜로디와 리듬에 빠져서 즐겨부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기서 신성모독하는 내용들을 실지로 들어봅시다.


○ 마돈나

여러분도 아마 이름을 들어서 잘아시겠는데, 마돈나라는 미국 여가수는 1980년대 후반부터 관능적인 몸매와 무대매너로 최고 인기 대열에 드는 가수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숱한 소문들이 늘 그녀를 떠나지 않고 있는데 그녀는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너무도 놀랍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십자가 수난상의 그 남자를(육체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가지고 다닌다.

마돈나는 신성모독의 표폰입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탄의 조종하에 조롱하기 위해서 십자갈르 모독하고 있습니다. 무대 위에서 하는 행동은 가히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십자가를 흔들면서 몸을 앞뒤로 흔들고 무대위를 구르고 남자 무용수들과 마치 성행위를 하는 듯한 야릇한 몸짓을 취합니다.


○ 비틀즈

록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국의 그룹으로써 4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은 드루이드교가 사용하는 곡의 리듬을 이용해 록의 모습을 변형시켰으며, 힌두교 정신, 선의 정신 등을 로큰롤에 이용해 말세적 종교 사상이 전세계에 퍼지도록 만들었습니다.


○ 조지 해리슨

?나의 사랑스런 주님?을 부른 주인공으로서 비틀즈의 맴버였습니다. 그의 이 사악한 노래는 우리 기독교인(특히 영어를 잘모르는)에게 록음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이 노래의 ‘주님’은 다름 아닌 이방신(힌두교의 신), 즉 사탄입니다. 조지 헤리슨은 이 노래 중에서 “할렐루야”를 외쳐댑니다. 그러나 찬양의 대상은 엉뚱하게도 흰두교의 ‘크리슈나’인 것입니다. 별 생각없이 「할렐루야=하나님 찬양」이라 생각하고 이 노래를 즐겨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가사를 읽어 보겠습니다.

사랑스런 나의 주님, 당신을 보고 싶고 함께 있고 싶어요.

정말 당신을 알고 싶어요. 정말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오래 걸리진 않겠지요......  할렐루야...... 할렐루야.......

사라스런 나의 주님 ......

하레 크리슈나! ........


○ 엘비스 프레스리

신비술에 관심을 가졌으며 초월적인 현상을 연구하고 심령주의자와 규칙적으로 만났습니다. 나아가 그는 흰두교 신비주의자인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에게 헌신하였습니다.


○ 래드 채프린

독일의 폭격기 채펠린에서 이름을 따온 록그룹입니다. 그들은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라는 노래로 불멸의 가수가 되었습니다. 이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무서운 가사가 들어있습니다.

여기 나의 사랑하는 사탄이 있다. 사탄은 우리의 구세주!

내가 너희에게 666을 주노라! 예수는 우리를 배반했다.


○ 롤링 스톤즈

타락의 극치를 보여 주었던 그룹입니다. 그들의 말을 음미해 봅시다.

내가 20세 때 사탄이 나타나 계시하였다. 나는 사탄을 믿고 있다.

사탄은 나의 은인이며 나를 유명하게 만든 나의 구세주이다.

누가 뭐라고 할지라도 나는 사탄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싶다.

그들의 노래 「D (devil : 악마) 박사와의 춤」에서 주술과 귀신들린 듯한 비명을 지르면서 사탄적 이미지를 물신 풍깁니다. 또한 「」 「너무 많은 피」는 한 여인의 머리를 절단하고 몸을 냉장고에 넣는 소름끼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② 섹스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또 록음악이 끼치는 해악중의 하나는 ‘섹스를 조장한다’는 점입니다. 선정적인 춤과 가사와 리듬을 가지고 성욕을 불러 일으킵니다. 특히 외설을 넘어서 타락의 극치를 보이는 것으로 동성연애와 변태적 성행위를 찬미하기도 합니다.


○ 도나 서머

한창 ‘디스코’라는 장르의 음악이 풍미할 대(1970년대 후반) 「도나 서머」는 「Love to love you, baby」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금 당장 나를 가져 달라”는 듯한 절규가 들리는 음탕한 노래입니다.


○ 대보라 헤리

그룹 블로디의 여성 보컬인 그녀는 한때 플레이보이 클럽의 호스테스였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미국의 뚜쟁이)의 주제곡 「콜 미」(Cal I me) fh 대단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녀는 섹스의 화신으로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콜 미」라는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록에 있어서 주요소는 섹스와 멋진 무대 쇼, 그리고 야한 음악이라고 늘 생각한다.

로큰롤은 100% 섹스이다. 그것은 사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나를 흥분시키기도 한다.

나를 키스로 덮어줘요! 사랑으로 덮어줘요!

나를 디지이너의 시트로 굴려줘요. 난 충분치 못할 거예요 ....

언제나 어디서든 어던 방법으로든 나를 부르세요!

당신의 애인으로 부르세요!


○ 마돈나

그녀는 자신의 대중 앞에서 선정적으로 또한 방탕한 여자로 보이도록 의도적인 모습을 취합니다. “성은 이미지의 내 일부이다. 나는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그녀의 말은 이를 대변해 줍니다. 그녀의 비디오는 노골적인 성행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처녀처럼」,「기도자처럼」 등 노래로 우리나라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 데이빗 보위

그 스스로 양성연애자임을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는 무대에서 전위적인 음악을 연주하는데, 오랜지색으로 물들인 머리에 레이스가 달린 높은 굽의 부츠를 신고 여자 옷을 입은 채로 다른 남자와 성적으로 결합하는 흉내를 냅니다. 그의 노래 중 「음란한 여왕」은 유명한 동성연애 노래입니다.


○ 앨리스 쿠퍼

그는 몰몬교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변태성욕자로서 그의 무대 매너는 구역질 날 정도로 추잡합니다. 인형을 조각내어 자르는가 하면, 목에 뱀을 감고 그 뱀에게 사랑을 구하기도 하고, 마네킹을 데리고 성행위를 벌이는 흉내를 냅니다. 그의 노래 「요술주머니」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들어 있습니다.

허리 띠를 내려요. 나의 벨벳 장갑(여자의 생식기 상징)을 애무해 주세요.

나는 나의 가죽 부츠(남자의 생식기 상징)를 집어 넣은 기분이예요!


③ 폭력, 파괴, 살상을 부추깁니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굉음을 내면서, 폭력, 파괴, 살상의 사탄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들은 섬찍한 문신, 가죽바지, 체인등의 몸장식, 이마를 동여맨 붉은 띠, 금방이라도 칼을 들고 달려들 것만 같은 호전적 태도를 취합니다. 그들은 청소년들에게 폭력이 나쁜 것이 아님을 은연 중 알려줍니다. 폭력을 옹호하고 실제로 무대에서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 대표적인 가수는 엘리스 쿠퍼입니다. 그는 변태성욕자였을 뿐만 아니라, “나는 죽음을 사랑한다.”고 노래하며, 사형대 위에 자기 목을 매다는 행동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청소년들의 맑은 심성을 더럽히고 찢어놓은 것을 볼 때, 귿르의 록음악의 폐해에서 속히 구해내야 하겠습니다.

⑵ 폭력, 섹스, 마약으로 일관되어 있는 ‘랩음악’

특히 폭력을 조장하는 음악의 장르는 ‘랩음악’이 있습니다. 랩이란, 「톡톡 두드리다!」라는 뜻입니다. 속어로는 「잡담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랩송은 한마디로 ‘짜여진 틀 배격하고 타악기 등의 단순하고 강렬한 리듬에 지껄이는 듯한 가사를 읊조리는 노래로서 격렬한 춤 동작이 함께 합니다. 이러한 장르 음악은 80년대 중반의 흑인그룹 “런-LMC”가 흑인 빈민가를 떠돌던 사설조의 음율을 노래화 하면서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 흑인 빈민의 백인사회에 대한 불만이 랩이란 노래로 표출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제는 폭력, 섹스, 마약 등으로 일관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태지와 아이들 그리고 현진영과 같은 가수들이 이 랩송을 불러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상당히 결렬합니다. 얼마전에 무심코 T.V 쇼 프로를 보게 되었는데, 현진영과 몇 사람이 나와서 노래와 함께 춤을 추는데,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참석한 청소년들이 장단에 맞춰 박수를 치며 환호는 모습을 보면서, 랩음악이 청소년들의 정서를 얼마나 오염시키고 있는가를 더욱 실감하였습니다.

2. 대중음악에 대한 우리의 대안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안방 깊숙이까지 파고들어오는 이러한 세속음악의 해악으로부터 우리의 자녀들과 우리 자신의 영혼이 오염되지 않도록 지키려면 어떻게 대처 해야 하겠습니까? 아무런 대안도 없이 세속음악의 해악 가운데 방치해 둔다면 머지 않아서 무서운 결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어던 복음송 가수나 교회음악 지도자들 가운데는 그러한 대중음악이 끼치는 해악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고, 젊은 청소년들의 마음을 복음으로 끌기 위해서는 복음송에 까지도 록음악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미 많은 복음송 안에 록음악이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교회와 교회음악 지도자들, 그리고 성도들 모두가 대처하고 나아가야할 방안은 무엇이겠습니까? 영혼을 오염시키는 대중음악으로부터 믿음의 자녀들을 구출하고, 그러한 음악이 교회음악 가운데 들어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기서는 앞으로 우리가 어느 부분에 대처하고 나가야 하겠는지, 그 방향만 몇가지 제시하고자 합니다.

1. 대중음악이 끼치는 해악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2.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신앙정서에 큰 유익이 있음을 인식시켜줘야 합니다.

3. 믿고 부를 수 있는 신령한 노래들을 지어서 보급해야 합니다.

4. 교회음악 안에 세속음악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잘 단속해야 합니다.


이상의 몇가지 방향을 가지고 세속음악의 해약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킬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 해악을 이해하고 대처해 나가야 하겠지만, 특히 교회적으로 그 해악을 잘 파악하여 대처하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신령한 전투를 하여야 할 가장 현실적인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예배 찬송에 관하여

김홍전목사님의 저작과 ?찬송?을 중심으로

① 요즈음 상영하고 있는 음악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은 진한 감동과 함께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한다. 꼴롱보라는 위그노 음악가의 생애를 그린 그 영화에서 인상적인 한 장면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캄캄한 밤에 꼴롱보가 그의 제자 마랭 마레에게 그 폭풍 속에서 저음부부터 스타카토까지의 음을 들어보라고 가르치는 부분이다. 그 위대한 음악가에게는 자연이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의 음악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런 음악가는 아니더라도 우리 주위는 온갖 종류의 음으로, 그 음의 운동(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그 음악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우리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의류 매장에 가면 대체로 빠른 팝송을 들을 수 있는데, 경쾌한 음악을 틀지 않았을 때보다 20%의 매상을 더 올릴 수 있다고 하니, 여기에서도 음악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음악과 우리 생활은 뗄래야 땔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는데, 생활의 중심인 예배 역시 음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의 구원을 받았을 때 그들은 즉시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로 시작하는 노래로 구원의 하나님을 기렸다(출 15:1, 21). 또한 시편 기자는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 지어다”고 찬양을 가르친다(시 33:1, 3). 히브리서 기자도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가르친다(히 13:15). 이러한 명시적인 가르침 때문에, 예배와 찬송의 긴밀한 관계를 부인하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할 것인가? ‘어떤 찬송’을 드릴 것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면 엄청난 의견의 차이가 발생한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잇는 “목요찬양모임”의 영향을 받아 헤비메탈(heavy metal)을 사용하는 “복음송”(gospel song)을 즐겨 부른다. 그 모임에서 부르는 곡들은 대체로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현하거나 감성에 호소하는 것들이다. 가사에 성구가 들어 있는 점을 제외하고는 일반 로큰롤(rock'n'roll)이나 팝송과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로큰롤을 싫어하는 장년층은 그런 찬양이 나쁜 것이고, 심지어 사탄적이라고까지 비난한다. 반면 그것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은 기존의 찬송가에도 예전의 “복음송”들이 많이 들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 차이를 단순한 세대간의 문제로 돌려버린다. 세월이 흐르면 그들이 부르는 “복음송”도 찬송책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찬송책에 “복음송”이 많이 들어 있음은 사실이다. 19세기에 회개와 전도 그리고 선교를 강조하는 대규모의 부흥 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났는데, 그때 회개와 전도를 좀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흑인 영가나 째즈(jazz)를 이용한 “복음송”을 만들었다.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어떤 유명한 부흥사처럼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이 있듯이 사람을 회심시키는 법칙이 있다”고 말하면서 사람의 감정을 조작하는 방법론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복음 전파도 하나님 중심에서부터 그러한 방법론을 잘 사용하는 “유명한” 설교자 중심으로, 즉 인간적인 것으로 점차 변모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평가이고, 좀더 상세한 평가는 다른 지면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회심의 법칙”의 하나로 등장한 복음송도 자연히 인간 중심적인 특징을 지닌다. 회개를 강조하기 위해 세상을 부정적으로 그리는 가사들이 애탄조의 가락이나 삼박자 풍의 노래와 함께 짝을 이루기 시작했고, 복음 전파의 열정을 고취하기 위해 당김음을 많이 사용하거나 단순한 리듬을 반복하는, 그리하여 흥분 상태로 몰아가는 노래들이 만들어졌다. 비록 완화된 형태이지만, 후렴구가 붙은 노래들이 대체로 그런 류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찬송가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부흥 운동에서 선교에 헌신하고 온 사람들이다. 물론 구 프린스턴(the Old Princeton)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도 있었지만, 이들 역시 음악적 소양이 잘 갖추어진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중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을 한국 교회에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19세기의 “복음송”이 이 한국 교회에 소개되었고, 유럽 대륙의 시편 찬송 등은 찬송가 앞부분에 있는 몇 곡만 소개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애탄조의 노래들은 일제하의 상황이나 한(恨)의 정서와도 일치하는 바가 있어, 점점 더 많은 “복음송”이 찬송가에 들어왔다. 한국 찬송가에 수록된 “복음송”의 비율에 대한 어떤 연구에 의하면, 최초의 악보 찬송가인 [찬양가](1894)에 는 117장 중 28곡(24%),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발행한 [찬숑가](1908년)에는 266장 중 104편(39%), [신정찬송가](1931)에는 314장 중 132곡(42%), [신편찬송가](1935년)에는 400장 중 166곡(42%, 성결교에서 만든 [부흥성가](1930))에는 342장 중 193곡(42%), [합동찬송가](1949년)에는 586장 중 312곡(55%), [새찬송가](1962년)에는 671장 중 289곡(43%), [개편찬송가](1962년)은 620장 중 182곡(29%)의 “복음송”을 포함하고 있다.(강신우, [찬송가의 올바른 이해] 기독교음악사, 1983년, 101 - 107쪽 참조.) 외국 찬송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복음송”의 비율이 높다. 말하자면 아류(亞流)라 할 수 있는 “복음송”이 한국 교회 찬송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현재의 찬송책에도 “복음송”이 들어 있다는 젊은이들의 지적은 ‘역사적’으로는 옳다. 그러나 그 지적이 곧 현재의 “복음송”을 ‘음악적’으로나 ‘성경적’으로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복음송”을 정당화하려는 자들은, 비록 그들이 로큰롤의 가락이나 리듬 그리고 그 비트를 이용하더라도 거기에 말씀이 담겨 있기 때문에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전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영어 가사의 뜻은 전혀 모르면서도 팝송을 수백 곡 불러대는 친구를 본 적이 있다. 가사가 아니라 그 곡 자체가 그 친구의 감정과 생활방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 음악 전문가들은 로큰롤 “복음송”을 두 세 시간 불러 도달한 감의 정도가 동일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추상성이 매우 높지만, 곡 자체가 메시지를 담아서 전달하고 있다는 음악의 기본적인 사실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송”이 성구를 포함하고 있기에 괜찮다는 주장은 ‘음악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노래는 가사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지금의 찬송책에 포함된 19세기의 “복음송”이나 젊은이들이 즐겨 부르는 최신의 “복음송”은 모두 표면상으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인간의 감정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예나 지금이나 “복음송”을 부르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거나 기쁨을 고취하기 위해 감상적이거나 로맨틱한 곡을 부르고, 혹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행진곡풍의 노래를 부르며, 전도를 하기 위해 회개를 촉구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다양한 곡을 부르지만 공통된 것은 그 노래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향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찬송은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전도의 수단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독일 예술가곡(Kunstlied)을 오페라 아리아처럼 불러서는 안 되듯이 찬송도 다른 노래를 부르듯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술가곡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예술가곡을 제대로 부를 수 있듯이 찬송이 무엇인지를 성경에서 배우지 않고는 바른 찬송을 드릴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은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로 가르친다. 앞에서 인용한 히브리서 13:15에서도 그 “입술의 열매”를 “찬미의 제사”라고 하며, 시편에서도 하나님께서 찬송을 기뻐 받으심을 제사에 비교하여 가르친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 69:30, 31). 찬송은 우리가 드리는 것이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찬송도 그 기원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게 있음을 가르친다(사 57:19). 제사도 인간이 드리나 그 기원은 하나님에게 있고 그 법도도 하나님께서 일일이 가르쳐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찬양으로써 인간의 감정이나 헌신을 북돋우려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내용을 그 법도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흔히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제사를 드리는 인간의 정성이나 감정을 강조하는 이교적인 것이고, 계시 종교인 기독교의 제사는 그것을 받으시는 하나님께 모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다가 그 불에 죽은 일이 제사의 법도를 가르치신 직후에 발생하여 후대의 제사장들에게 큰 경고를 주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항 것이다(참고. 레 10:1,2)

구약의 제사에서는 제사장과 제물이 모두 무흠해야 했다(참고. 레 21:16-24; 22:18-25). 그러나 사람으로서는 아무리 정성을 다 기울여도 무흠할 수 없다. 따라서 찬송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지 낳고 철저히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할 것이며, 드리는 찬미 역시 하나님께서 직접 받으심직한 것이 되어야지 인간의 감정을 쏟아 붓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됨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음악을 하고 아무리 자기의 정열을 다 쏟고 정성을 다 모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찬송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김홍전, <중생자의 생활>, 184쪽) 그래서 시편 기자도 “여호와여 구하노니, 내 입의 낙헌제(樂獻祭)를 받으시고,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간구하면서 찬송을 드렸던 것이다(시 119:108). 혹시 예배시에 부르는 곡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성호를 담는 찬송을 부를 때는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전 5:2)는 말씀을 명심하고 거기에 합당하게 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②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상달되는 찬송의 제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인가? 찬송이 제사라면 구약의 제사에 대해 공부를 하고 그것을 모형으로 삼아 어떻게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것인지 논의해야 할 것이다.

구약의 제사를 몇 종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죄를 속하는 제사로서 속죄제와 속건제가 있다. 속죄제(贖罪祭)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죄에서 속함을 받는 것이고, 속건제(贖愆祭)는 사회 생활을 하면서 행동이나 말로 남에게 피해를 준 허물에 대해 죄사함을 받고 사람에게 배상하는 것을 나타낸다. 둘째는 번제(燔祭))인데, 태워서 드리는 이 제사는 자신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을 표현한다. 세 번째는 소제(素祭)인데, 떡을 빚는 고운 가루를 하나님께 드리는 이 제사는 우리의 일상 생활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과 순결함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화목제(和睦祭)가 있는데, 이것은 제물을 완전히 태우지 않고 거제(擧祭)나 요제(搖祭)로 드려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을 확인한 후 제사 드린 자들이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함께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응식(應食)으로 주시는 음식을 하나님 앞에서 함께 나누는 여기에서 거룩한 교통은 절정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찬송에서도 이러한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찬송은 먼저 그리스도의 속죄의 터 위에서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야 할 것이고(속죄제, 속건제), 속죄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체를 주장하셔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할 것을 기려야 할 것이며(번제), 또한 일상 생활에서도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순결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끝까지 나간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찬송할 것이다(소제).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바른 제사를 드린 자의 마음에 그 제사를 받으신 거룩한 표로 “나의 마음 가운데에도 그 기쁨을 나누어 주시고 평안함을 주시고, 또 주님을 향한 더욱 간절한 신앙을 주시고, 주님께 더욱 감사하는 감정을 주시며, 주를 찬송한 사람답게 형제에 대해서도 항상 마음이 아름답고 따습고, 평안함을 남에게 끼치는 이런 거룩한 상태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화목제). (김홍전, [중생자의 생활], 188-189쪽.) 사실 이러한 평안과 기쁨은 울적하니까 흥겨운 리듬의 노래를 불러서 감정을 북돋우려는 것과는 천양(天壤)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표로서 누리게 된 평안이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고 어떤 것으로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③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해서 드려야 하나님께 바른 찬미의 제사를 드릴 수 있겠지만, 그 제물 역시 무흠한 것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즉 곡 자체도 좀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숭엄함을 향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것이 예배 찬송이 되려면 예배의 진행과 밀접히 관계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예배 찬송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이 좋겠는가?

김홍전 목사님의 [찬송] 서문에는 이 [찬송]이 사용되는 실례로 예배의 순서를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전 주

시편 낭독

주기도

(영광송)

(성삼위송) ???????????????????????? 기 립

기 도

(경배송)

성경낭독 ????????????????????????? 착 석

(헌상송)

(헌상기도)(송영)

강설 및 기도

(송 영)

축 도

후 주


여기에서 보면 찬송이 영광송, 성삼위송, 경배송, 헌상송, 송영의 다섯 가지로 분류되어 작곡되었다. 영광송(gloria)은 12곡 수록되었는데, 그 가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노래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즉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영광 가운데 계신 그분의 거룩하심을 먼저 뵙게 되고, 그것을 찬송하는 것이다(참고. 사6:1-5).

어어 자리에서 일어나 성삼위송(sanctus)을 부르는데, 성삼위송은 모두 17곡 있고, 가사를 보면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 하나님을 직접 기리는 것들이다. 즉 예배의 진전과 함께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삼위로 계심을 뵙고 그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린다. 이제 찬양의 내용이 영광송에서 성삼위송으로 발전되었다.

이어 목회자의 목회 기도가 있고, 그 다음으로 경배송(worship)을 부르는데, 경배송은 모두 36곡 수록되어 있고, 가사를 보면 삼위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와 속죄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전진 등을 노래하는 것들이다. 성삼위송에서는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심을 노래했는데, 이제 그 삼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들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참고. 계 4:10,11).

자리에 앉으면 목사님의 성경 낭독이 있는데, 여기에서 제사에 참여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말씀을 받고, 이어 헌상(獻上)의 예식을 거행한다. 헌상의 예식이 집행될 동안 신도들이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으니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공로로 받아 주시기를 고백하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 있다. 삼위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역의 결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경배송을 부르는 단계를 지나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주께 드리겠다는 것을 헌상송(offertorium)으로써 고백하는 순서인 것이다. 이어, 주님께서 받아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또 헌상송이나 송영을 드린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의식을 거행하면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물을 받으셨다는 표로 마음에 기쁨을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내려 주신다. 이 말씀에서 신자들은 영혼의 양식을 공급받되, 다른 지체와 함께 그 말씀을 나눈다.

강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은 신도들은 예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doxa)을 보며 그 영광을 기리는 송영(doxology)을 부른다. 그리고 목사님의 축도와 함께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절하는 예배 의식이 마치게 예배식이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예배 구성에서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의 교제가 점차 깊어지는 것을 현저하게 느낄 수 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로 나가기 위해 마음을 모으는 전주(prelude)로 예배가 시작되고, 이어 시편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들은 자가 주님 가르치신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삼위로 계심을 노래하고, 기도를 올리며, 또한 삼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경배하고 말씀을 듣고, 헌상의 의식을 집행하고, 말씀의 뜻을 배우고, 그 영광을 찬송하고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도함으로써 예배가 마치도록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치 크레샌도로 점차 커지다가 데크레샌도로 조용히 곡을 마치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 백성의 주고받는 교제가 점차 깊어지다가 조용히 마치는 것을 현저히 볼 수 있다. 이렇게 진행되는 예배 순서에서는 인간의 불순하고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토로되는 것을 극도로 억제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의 마음이 향하게 하며 그것이 더 깊어지도록 구성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성이 앞에서 살펴본 제사의 원리와 일치함은 물론이다.


④ 제사의 정신을 따라 작곡한 김홍전 목사님의 [찬송]은 모두 133곡의 찬송과 오라토리오 “루디아”가 수록되었다. 작곡 연대는 1933년부터 책의 출간 1년 전인 1981년까지 약 반세기에 걸쳐 있다. 그런데 작곡 연대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일제 말기인 1942-44년까지에 24곡, 김 목사님이 목회 하시는 성약교회의 설립 초기인 1964-68년까지 73곡, 도합 97곡이 두 시기에 작곡되었다. 거의 3/4이 두 시기에 작곡되었으므로 우리는 작곡의 배경이 된 두 시기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1942-44년은 일제 말기로 정신대를 포함한 각종 공출이 한국 민족의 사회. 경제적인 삶을 도탄에 빠뜨렸고, 종교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내선일체의 구호 아래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식량 배급표를 주지 않던 암울한 시기였다. 그러나 신사 참배를 하지 않아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저자가 이 시기에 지은 찬송들은 전혀 다른 세계를 노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의 복을 노래한 “시편 1편”이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목자로서 인도하기 때문이라는 “시편23편”을 바로 이리한 시기에 작곡하였다. 역시 동일한 시기에 지은 경배송 1법은 이러한 가사로 찬송한다.

“오 여호와 주게 지나이다.

거룩하신 주여 이 죄인이 왔으니,

오 자비의 주님 귀 기울이소서.

이 궁핍하고 가난한 저를,

나의 주 하나님, 오 내 아바 아버지여

그 보혈로 주의 은혜로

정결, 정결하게 씻으옵소서.

나의 주 하나님, 아바 아버지여

들으소서.

곤고한 죄인

주 앞에 나와 비나이다.

주 하나님 앞에 기도하나이다.”


그 시대의 할 수 없는 위치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곡 자체는 센티맨탈하지 않고 오히려 웅장하고 잘 절제되어 있다. 이 곡은 성삼위 1법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그 간구에 대한 대답처럼 보인다.


거룩한 천부 거룩한 아들 거룩한 그 신 성삼위일체.

주님은 전능 그 크신 영광, 만물은 함께 주 찬송하도다.

거룩한 천부 거룩한 아들 거룩한 그 신 성삼위일체.


마치 욥이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간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셨고, 그때 욥의 모든 의문은 눈 녹듯이 사라진 것을 연상케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존재에서 그 시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던 이 시기의 찬송은 비탄조나 애탄조의 곡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영원하고 힘찬 전진을 노래하는 곡들이다(특히 경배송 33변, 34번).

또한 이 [찬송]은 저자가 목회하시는 성약교회의 설립과 긴밀히 관계되었다. 교회를 세우면서 예배 의식(禮拜 儀式)을 개혁하고 [찬송]을 새로 펴냈으며 앞에서 살펴본 예배식 순서를 사용하였다. [신앙의 도리]에서 그러한 의도를 간취할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


“참된 교회로서의 위대한 능력을 바로 나타내려면 당장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예배할 때의 방법으로서 가지고 있는 찬송이나 기도나 성경 낭독이나 성경에 대한 생각이나 이런 것들을 모두 바로잡는 것이 우선 필요한 일입니다. 이런 것을 바로잡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멀리 가서 굉장한 문제를 먼저 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122쪽)


“개혁교회로서의 자신의 정상적 자태를 드러내겠다 할 때는 먼저 교회가 그 공식 예배에서 교회 행동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신중하게 이런 문제부터 바로잡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러분이 찬송에 대해서 앞으로 주의해서 찬송 그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의미 있게 쓰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한 신중한 자세로 찬송하는 것이 좋습니다.”(129쪽)


길게 인용하였지만, 예배 의식의 개혁에서부터 개혁 교회의 특징을 지적한 이 대목은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예배 의식, 즉 인간의 종교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가시적인 형상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말씀을 바로 전파하는 데서부터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정신을 잘 담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1항은 예배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인간의 상상이나 고안에 따라서 혹은 사탄의 제시에 따른 어떤 가시적인 형상화에 따라서 혹은 성경에 규정된 것 이외의 방식으로 예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친히 참되신 하나님을 받으심직하게 예배하는 방법을 제정하셨으며 그의 계시된 뜻으로 제한하셨다.”


종교개혁자들은 단순히 로마 카톨릭의 의식만 비판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중요 부분인 찬송도 개혁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성가대만 찬양을 드렸으나 루터 이후 만인 제사장의 원칙에 입각하여 회중 찬송이 도입되었으며, 새로운 찬송이 작곡되었다. 루터는 “내주는 강한 성이요”로 시작하는 찬송을 직접 작곡하기도 했고, 칼빈이 목회하던 교회에서는 시편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다(Strassburg Psalmter, Geneva Psalmer).

그런데 루터의 [비텐바르크 찬송가](Witienberg Gesangbuch) 서문에는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나는 젊은이들이 사랑의 민요나 난잡한 노래를 버리고 대신 온전한 것을 배우며 그래서 기꺼이 선(善)에 복종하기를 바란다. 나는 어떤 완고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복음을 통해 예술이 멸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든 예술은, 특히 음악은 그것을 창조하신 그 분의 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루터는 하나님께 바른 찬송을 드릴 때 세상의 난잡한 것에서부터 벗어나고 진정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음을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화목제를 받아 누리는 것과 동일한 내용인 것이다.

개혁교회가 대(對)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들고 나와서 개혁을 외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에서부터, 찬송을 바르게 부르는 일부터 시작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요 4:23; 대하 16:9). 먼저 교회가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때 거기에서 하나님도 뵙고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그 은혜와 힘과 지혜로 이 거스르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도 있고 그것을 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바른 예배 찬송은 우리의 모든 생활을 지배한다. 자기의 감정만 토로하는 곡으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위치에 이를 수도 없고, 따라서 삶을 기독교적으로 영위할 능력과 지혜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없는 것이다.


⑤ 이사야 선지자는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사 42:9)고 선언한 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사 42:10)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이를 새로운 구원을 보면서 새 노래를 부르라고 권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땅끝까지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소아시아 지방의 에베소서에도 전파되었을 때, 사도 바울은 종말에 사는 성도들에게 성신의 충만을 받을 것을 명하고(엡 5:18) 이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라고 가르친다. 새 노래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새로운 구원의 일을 성신으로 깨달은 자만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다른 성도와 함께 부를 수 있다. 이 새 노래는 신령한 노래이고 예배를 중심으로 우리의 전생활을 통해 울려퍼지는 노래이다. 새로운 구원에 기초한 새 노래는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그 이름을 증거하는 찬송의 제사”이다. 특히 온갖 종류의 기계음으로 가득한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는 그들의 진정한 갈증을 채워 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기계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능력 있게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새 노래이고, 입술이 있는 자라면 마땅히 맺어야 할 열매인 것이다.


(이 글은 전거를 일일이 밝힐 수 없을 정도로 김홍전 목사님의 가르침과 그 책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신앙의 도리」 118-129 쪽, 「중생자의 생활」 173-190 쪽의 찬송에 대한 것을 많이 참조했다. 그러나 이 글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