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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그랄~~` 2015. 3. 23. 16:49

 

 

 

 

 

                   서     론


  칼빈주의는 근대 세계를 특징지어 주는 여러 요소들, 예를 들자면 자본주의, 근대 과학, 복잡한 서구 사회의 규율과 합리화 혁명적 정신과 민주주의, 세속화와 사회적 행동주의, 개인주의, 공리주의, 그리고 경험주의에 기여했다고 널리 인정되어져 왔거나 혹은 그렇다고 비난 받아 왔다.1)  그러나 이러한 자타가 인정을 받을 만한 그의 업적과 공헌은 거의 최근까지도 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가 거의 근래에 들어와서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한국 교회나 세계의 많은 이들의 막연히 진정 아닌 존경을 받고 있으면서도 진정한 그의 사상과 업적에 대해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 W.J.부스마는 몇 가지 이유를 들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칼빈은 신학자들과 칼빈 전문가들의 손에 내맡겨 놓았는데, 역사적 칼빈에 대한 이들의 관심이란 기껏해야 주변적인 것이다.  또 하나는 칼빈의 추종자들에 의해 세워지고 제네바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장 알려진 대학 뒤편의 개혁자들의 벽에 서 있는 거대한 칼빈의 조상에 암시되어 있다는 것이다.2)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 단순히  칼빈의 명성만 듣고 대충 흘려 버리는, 또 그들의 말에 비판과 수용 없이 맹종하는 독자들과 오늘날 수많은 그의 사상을 접한 바로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또 이제까지 다루어져 왔던 칼빈에 대한 사상 연구는 비역사적 방식으로 다루어져 왔고 혼란이나 논리적 비정합성, 모순 그리고 인간의 부족함을 나타내 주는 여타의 다른 요소들을 갖지 않는 것으로 가정되어 왔다. 3)

  칼빈에 대해 이해하기란 어렵다.  루터나 그 밖의 인물들보다 그는 더 복잡하고 난해해 보인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칼빈의 생애와 인을 전반적 이해를 그 연구 범위로 두되, 특히 칼빈 사상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주제에 걸친 그의 사상을 살펴 보고자 한다.



                   본     론

1. 칼빈의 생애

 1) .  칼빈의 초기 생애와 교육

  중세기 기독교회의 권위 아래 있던 유럽에서는 이태리를 중심 하여 문예부흥 운동이 새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사실상 이러한 운동을 성경을 보는 안목을 본격화시켰고 인간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때, 즉 15세기 후반에 걸쳐서 전  인류와 교회에 위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우리가 잘 아는 종교 개혁자 루터라든가. 멜랑히톤, 에라스무스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을 따라 한 위대한 인물이 세상에 햇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칼빈이었다.  칼빈은 본래 프랑스 북쪽 피카르디 지방에 있는 노욘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제랄코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4)

  그는 12세 때 아버지의 영향력에 의해 노용 대성당에서 성직을 얻었고,  1523년에 드양제 집안의 소년들과 함께 파리에 가서 라 마르쉬 대학과 몽테귀 대학에서 인문과학을 공부했다.  칼빈이 여기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 후 그의 아버지는 그를 오를래앙 대학교에 보내어 저명한 법학자인 피에르 드 레스토알 아래서 법학을 공부하도록 했으며, 칼빈은 잠시 부르지 대학교에 가서 유명한 이탈리아인 법학자인 알차티의 강의를 들었다.  그후 1531년에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칼빈은 파리로 돌아갔다.5)

  칼빈이 이 두 번째로 파리에 체재하고 있는 동안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학구적인 주석을 썼는데 이것은 그의 최초의 저서로서 의미 깊은 저작이었다.  칼빈의 이 저작은 1532년에 나타났다.  이 저작은 칼빈이 에라스무스와 뷔데의 모범을 따른 조예가 깊은 휴머니스트임을 드러냈으며 그가 희랍어를 읽고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고대 문헌과 역사를 폭넓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후에 종교 개혁자로서 활동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리고 그것들은 다른 프로테스탄트 휴머니스트 활동가들과 우정을 나누는 데 있어서 확고한 근거가 된다.6)

  칼빈은 18세 때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 칼빈의 아버지는 직장에서 파문에 이르게 되었고 그것은 아들의 장래를 재고하게 했다.  그리하여 칼빈은 올레앙대학으로 법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 공부는 1532년 1월 14일 전에 끝이 났다.7)


2). 프로테스탄트로 회심

  칼빈이 언제 프로테스탄트로 회심했는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아마 1534년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하여 “갑작스런 회심”이었다고 한다.  그는 라틴,헬라,히브리 문학을 배웠기에 이러한 말로써 성경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문학 연구가 인연이 되어서 “문예부흥”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가까운 교재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사람도 있었다.8)  1534년 5월 4일 칼빈은 노욘에서 성직을 포기하였다. 어떤 언어보다 더욱 분명한 것은 이 행동의 선언이 그의 “전향”을 이룩한 것이라 본다. 교황청의 루터에 관한 문서들의 비타협적인 폐기 처분, 성서적인 신앙으로 순교를 당하는 용감한 고난, 반 개화 사상, 성인 숭배, 행렬 기도, 유골, 면죄부 판매, 의식주의    등을 봄으로써 칼빈은 오히려 성서로 진입하였으며 교부들에 대하여 열렬한 연구로 들어갔다.9)  이후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여 대 호평을 받았고 1537년 8월에는 그는 여행을 계속하는 도중에서 쥬네브에서 머물렀는데 여기서 그의 종교개혁의 작업이 시작되었다.


2. 신학 사상

 1). 보편 섭리와 특별 섭리

  칼빈은 철학자들처럼 보편 섭리를 인정하나 그의 주 관심은 하나님의 특별 섭리에 대한 칼빈의 기본적 통찰력은 그의 섭리론과 예정론에 잘 나타나 있다.10)  그는 “하나님의 특별 섭리에 에 대하여”라는 주제하에 쓰기를, “섭리란 땅위에서 진행되는 것을 하늘에서 하나님이 게으른 모습으로 관찰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창조된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의미이다.11)  그러므로 섭리에 관한 칼빈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1)일반 은총 (2)특별 섭리(particular),일반 은총 (3)특별 섭리(special) 혹은 구원하는 은총으로 되어 있다.12)

  그의 목적은 하나님을 하늘에 가만히 있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과 보편적 섭리의 교리를 이해하는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특별 섭리에 관한 토의에서 칼빈은 또한 일반 은총과 보편적 섭리는 다르다.  칼빈이 생각하길, 어떤 것도 우연에 의하여 생기지 않고 모든 것이 그의 계획으로부터 나와서 모든 것을 그의 목적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믿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편 섭리의 교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심판을 위한 여지를 남겨 놓을 수 없다. 13)

  또한 칼빈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은 주실 뿐만 아니라 각 개인에게 구원의 확실성을 주실 때만이 온전히 설명되어 진다고 주장한다. 이 신앙의 확실성은 인간 정신의 주도 면밀성에서 예정은 인간의 능력으로 시험받을 수 없다. 성령의 은총으로만이 확실하고 분명한 지식을 얻어지는 것이다.14)

신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이 섭리와 예정 교리에 기초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칼빈의 신학에서 섭리론과 예정론의 관계성이다. 예정은 개신교 신학의 특징이다.15)


 2). 예정론

  종교개혁 이후 예정론은 주로 칼빈과 그의 사상적 전통에 서 있는 교회와 신학자들에 의해서 특징적으로 지지되고 주장되어 왔기 때문에 오늘날 ‘예정론’하면 주로 칼빈이나 또는 칼빈주의를 연상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같다.16)  칼빈에게 있어서 예정론은 전능하신 섭리의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관심에 대한 그의 기본적 확신이 섭리론과 예정론 모두에서 표현된다.  그러나 칼빈이 보편적 섭리와 특별섭리, 그리고 총체적 선택과 개인적 선택을 다루지만, 그의 입장은 철학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돌보심과 특수성에 있다.  칼빈의 예정이란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개인에게 이루어지도록 결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이 두 종착점 가운데 어느 쪽으로 창조되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은 살도록 예정되었다던가 아니면 죽기로 예정되었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제 1편에서는. 예정 혹은 선택이 교회론과 연관되어 다루어졌다.17)

  기독교 강요의 예정론, 성경 주석의 예정론, 신조에 나타난 예정론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공통된 결론에 이를 줄 안다.  첫째,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구원할 자와 유기할 자를 자위에 의하여 예정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미리 아시고 예정한 것도 아니며, 타락전 즉 창세전에 예정하셨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셨으며, 예정한 자는 끝까지 보전하셔서 확실히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18)

  칼빈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성경 안에 계시되었다고 주장하며 그는 그 가르침은 마땅한 겸손을 가지고 설명한다. 어떤 사상을 다루듯 예정은 연구할 수 없다.  인간은 예정에 관한 호기심에 가득찬 질문을 만족시킬 수 없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선택에 관하여 사색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도와주며, 인간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겸손을 가지게 한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를 결심한 자들을 선택하신, 멸망시키기로 결심한 자들도 거절하신다고 성경을 가르친다.19)


 3). 성경관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의 영원하고 침범할 수 없는 진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지지하기 위해서 성경이 신적으로 영감된 것을 선언한다. 칼빈은 부언하고 있다. “성경의 조명을 받게 될 때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게 되나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초월하여서만 성경이 하나님 자신의 입으로부터 직접 받아 인간의 봉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음을 완전히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20)  또 성화와 율법과의 관계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롭게 된다는 것이 성화의 열매인 선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제시하고자 했다. 여기서 율법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 없다는 ‘무율법주의’적 사고를 배격하고, 율법으로 의를 획득한다는 ‘율법주의’도 배격한다고 했다. 다만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율법은 ‘생활의 규범’으로서 제시했다. 칼빈에 있어서의 구원과 성화에서는 복음의 핵심이 회개와 죄사함으로서 이들이 신앙으로부터 나오고, 칭의와 성화의 근거와 이유라고 했다.21)


4). 칼빈의 대속교리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에서부터 그의 대속 교리를 시작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진노밖에는 받을 것이 없는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셨다. 칼빈의 사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묶여 있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계시이다. 죄인들을 위한 그의 죽음 속에서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한 구원을 성취하셨다. 22)

 5). 칼빈의 주권 사상

  그에 의하면 “주권사상”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칼빈은 하나님을 “영원, 영원부터 그 자신의 지혜로 그가 하시고자 하는 바로 실향하시는 만물의 중재자이시오 통치자이시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들을 포함한다. 그래서 선한 자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악한 자들에게도 적용되며, 인간과 천사들의 거룩한 행동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죄악된 행동들에게까지도 적용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교훈적으로 명한 것을 작정 적으로 결의하시고 그가 교훈적으로 명한 것을 작정 적으로 금하시는 것을 우리는 반박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주권교리는 원의 신앙과 경외를 요구하면서 가장예리하게 바로 문제에 초점을 모은다.23)


3. 시대의 길잡이로서의 칼빈

 1).사회

  다른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칼빈은 자신의 시대가 영적인 그리고 도덕적인 위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매우 치열한 노력이 요구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시대의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칼빈의 계획은 우주의 “입법자요 왕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념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가 세상에서 그의 통치 아래 살도록 전 세상을 거룩하게 만드셨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종교 개혁을 또 세속적 영역의 개혁을 지시하는 것을 의미했다.  칼빈은 가끔 세상의 무질서를 비난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는 질서의 회복을 하나님의 통치와 동일시했다. 이러한 동일한 원리는 또한 칼빈의 사회윤리에 항상 칼빈주의와 연계 되지만은 않는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부여해 주었다. 칼빈은 비록 세상의 지혜를 불신한다고 자주 고백하긴 했지만, 기독인의 어리석음을 결코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융통성이, 자신의 생각에 의하면 성서적으로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일종의 부르조아적 현실주의로 그를 기울러 지게 만들었다. 그는 악한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한 갖가지의 신중한 전략들을 권면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신은 그에게는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졌다. 또 한 칼빈은 기독인들이 정상적으로는 금지된 수단들을 취해야 할 이러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수단들을 취하는 것을 주저 없이 장려했다.24)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있어서의 칼빈의 이중적이고 모순된 태도는 부분적으로는, 그가 자주 다른 경우에도 그러한 것처럼, 양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이 결과였다. 그는 중간의 부와 지위의 양극단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선언하기를 “적당한 재산이란 얼마나 더 유용하고 바람직한 것인가! 이것은 최소한 평화로운 것이고. 맹렬한 시기 속에 노출되거나 음험한 혐의를 받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중산층적 태도가 또한 그로  하여금 노동을 존중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소명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힘들을 일차적으로 우리들의 일에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노동도 지나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칼빈은 중용의 입지를 얻으려고 조력하였다. 그의 소명론은 노동의 효율성에 기여했다. 특별히 소명론은 노동의 분업화를 촉진시켰다. 또 노동에 대한 칼빈의 존중은 검약에 대한 권면을 수반하고 있다. 그는 가끔 되풀이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검약과 절제를 권장하시고 풍부함 속에서 무절제와 사치하는 것을 금하셨다.  검약에 대한 그의 존중은 그리스도를 산소하고 검약한 생활의 유일한 본보기로 본 그의 입장을 형성했다.

   그러나 칼빈의 사회사상에 있어서 항상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공동체에 대한 그의 관심이었다. 그는 노동과, 부나 시간의 유용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그가 이러한 것들을 공동체의 필요에 부합하는 드문 자원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25)


 2). 교회

  그는 교회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기독교 강요」의 마지막 제 4권은 교회론 보다는 교회 조직적 면을 주로 다룬다. “교회의 참된 위엄은 내적이다.”26) 교회란 기존의 카톨릭 교회가 하나의 보편적 교회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 즉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 교회들이 바로 하나의 보편적 교회라는 시각이다.27)  그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만 형제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분리주의적 모형을 암시한 것이다. 칼빈에게는 그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재세례파에 가까운 면도 있었다. 그는 성찰이 공동체의 의식인 동시에 그것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은 미리 알려 주어야 했기 때문에 성찬을 높이 평가했다. 또 그는 교회를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해 그가 생각해 낸 최종적인 방안은 파문이었으며, 파문의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결과를 성찬에서 제외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목사의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을 인정하나 목사의 성도들에게의 권위와 위엄을 인정하나 칼빈이 세속정치 형태를 논할 때 그의 권위주의가 그의 종화 주의에 의해 수정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평신도의 존엄성에 대한 의식이 그의 성직자 주의와 긴장 관계에 있었다. 이것이 목사들은 적어도 원리상 교회의 전체 교인에 의해 선출되어야 하는 이유였다.28)

  칼빈에게 있어 교회는 “하나님의 학교”로서 신학교보다는 인문주의적 학원에 더 가까 왔으며, 그리고 그는 이제 하나님을 그의 학생들의 어깨위에 살펴보고 “그들의 제스쳐와 걸음걸이 말, 그리고 그의 ”모든것“을 지켜보는 분으로 생각했다.29)

  그는 또 때때로 하나님만이 궁극적으로 판단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이런 생각들이 그의 정신을 지배했을 때 교회에 대한 그의 이해는 더 이상 배타적이 아니라 포괄적이 되었다.30)


 3).정치

  영국의 청교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 프랑스의 위그노, 네덜란드의 베거, 그리고 미국의 필그림 파더, 이들 모두는 자기들의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는데, 이들 모두가 칼빈의 정신적 후예들인 칼빈주의자 들이었다. 따라서 칼빈이 근대 민주주의의 주창자라는 가정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다.31)

  제네바에서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법치적 신정정치’를 실현시킴으로써 서구 사회에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계기를 형성하였다. 그는 특히 그의 기독교 사상을 체계화한 기독교 강요를 통해 자유, 평등, 인권의 존중, 법에 의한 지배와 같은 근대적인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뒷받침할 만한 정치 신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칼빈의 정치 신학의 민주적 요소들은 두 왕국 사상에 입각한 이중의 정부론 및 자연법 사상을 포함하는 시민정부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고전적인 서구 민주주의 형태와 거의 동일한 귀족정치와 민주주의 형태와 거의 동일한 귀족정치와 민주주의 정치의 혼합 체제를 이미 제창했었고 독재와 악을 저지르는 통치자에 대해서는 합법적인 공직자를 통해 저항할 수 있다는 입헌적 저항권을 이미 제창함으로써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성립기초가 되는 주권재민의 사상도 제시한 셈이 됐다.32)

  칼빈이 시민 정부에 대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정부 형태에 대해서는 차선책으로 폭군정이 아닌 군주정도 인정했지만 최선의 정부 형태는 민주정과 귀족정의 혼합 정부임을 주장했으며, 선거에 의해 통치자를 뽑아 통치자가 법에 따라 통치하는 것을 최선의 길로 인정했다.33)

  칼빈에게서 자연법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시에 내려 준 것이었으나 인간의 타락의 역행으로 그 자체로서는 알 수 없고 타락으로 인하여 희미해진 것을 하나님이 성문법인 십계명을 통하여 명백하게 하여주신 것으로 십계명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법과 십계명을 동일한 것으로 보아 하나의 법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와 같이 은혜가 자연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은 은혜를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  칼빈의 자연법 사상은 중세의 전통에서 벗어나 자연법 사상을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과 동일시한 점에서 변화되었고, 그러면서도 인간성과 인간사회에 대한 공동적인 이해의 근거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34)


4. 칼빈주의


  여기서 칼빈주의란 말은 존칼빈의 이름과 관련이 있으며 그 연고를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1).정의

  칼빈주의란 루터파와는 구별되는 「개혁파」라고 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파의 신앙고백들과 교리문답들에 본질적으로 나타나 있는 신학적 신념의 체계를 가리킨다. 또한 칼빈주의라는 말은 칼빈이 개략적으로 제시한 교회정치 체제(장로제)를 내포하는 말일 수도 있으며, 그리고 매우 일반적으로 이 체제를 채택한 교회들 안에 있는 칼빈적인 교리 유형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교리와 정치의 이 연결은 결코 보편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치가 교리적 원칙들에서 자연적으로 파생한 것이 분명한 경우에 한해서만 정치를 고려해도 족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칼빈주의는 여러가지 형태의 교회정치 및 제도와 관련되어 왔음이 드러날 것이다. 칼빈의 교리들은 청교도 신학을 형성했으며, 그 교리들은 대체로 회중주의에 흡수되어 근래에까지 회중교회를 지배해 왔다.  칼빈주의 독특성은 정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교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35)


 2). 칼빈주의의 특징 (5대교리)

   칼빈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인간의 전적타락( Total Pepravity)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③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④ 거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able Grace)

  ⑤ 궁극 구원(Perpetual Salvation)


                                                                       

                              결    론


  앞에서 우리는 프랑스 신학자이자 교회 정치가이고 또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 가운데 한사람이었으며 서양의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 공헌했던 사상가였던 칼빈의 생애, 그리고  사상, 신학, 정치, 사회면에 걸쳐 고찰해 보았다.

  칼빈의 사상의 복합적이고 정치적인 특성을 인식하는 것이 결국 그 자신의 시대에 그의 이름을 붙이게 되는 그 운동이 성공한 것과 전혀 다른 상황에 있던 후의 세기들에 그 운동이 지속된 것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후의 칼빈주의자들은 그에게서 이 불안정한 혼합을 상속했다. 대립적이고 변화하는 충돌들 사이의 불확실한 균형인 칼빈주의는 중세 후기 교회와 동일한 방식으로 철저하게 와해되게 되었다.36)

  그러나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이 흔들림 없고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생활 규범으로 제시하여 귄면하고 교훈 한다.  또 신학적 측면에 있어서 칼빈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역사의식을 보여 주었다.  그는 교부들의 기독론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니케아 회의와 칼케톤 회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오늘날의 신학도 들은 역사적 계류가 결핍되어 있다.  칼빈은 기독교 교리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얻을 것을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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