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 (태조~ 27대 순종, 1392~1910년), 제27대 518년간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
구분 |
묘호(廟號) |
왕비(王妃) |
재위기간 |
1 |
태조(太祖):중풍으로 74세에 승하(1408년). 능은 건원릉으로 동구릉 안에 있다. |
신의왕후(神懿王后) 신덕왕후(神德王后) |
1392~1398 |
2 |
정종(定宗):오복을 다 갖추고 63세에 승하, 능은 유일하게 있는 후릉. 제1차 왕자의 난 |
정안왕후(定安王后) |
1398~1400 |
3 |
태종(太宗):폐렴으로 56세에 승하, 제2차 왕자의 난,능은 헌릉 |
원경왕후(元敬王后) |
1400~1418 |
4 |
세종(世宗):당뇨병과 종기로 54세에 승하(1450년). 능은 영릉. |
소헌왕후(昭憲王后) |
1418~1450 |
5 |
문종(文宗):아버지 세종을 닮아 몸이 허약해서 승하, 능은 현릉(태종의 헌릉과 다름) |
현덕왕후(顯德王后) |
1450~1452 |
6 |
단종(端宗):수양대군의 계유정란으로 17살때 서인(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에서 사사됨(1457년). 능은 장릉1453년. |
정순왕후(定順王后) |
1452~1455 |
7 |
세조(世祖):등창과 불면증으로 52세에 승하(1468년). 능은 광릉 한명회(韓明澮,1415~1487).자 자준, 호 압구정, 본관 청주.장순왕후(예종 비), 공혜왕후(성종 비)의 아버지로 1452년(문종 2)음보로 태조의 개경 잠저를 지키는 경덕궁직이 되고, 그 뒤 친구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의 모사가 됨.1453년(단종1)계유정난 때 살생부를 작성하여 단종을 보좌하던 신하들을 살해했고, 계유정난 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켰으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며 권력의 정점에 섰다. 세조가 죽은 뒤 원상으로서 서정을 결재하여 왕권을 능가하였다. 한강변에 압구정을 지어 놓고 은퇴하지 않는다는 풍자를 받기도 했다. 1504년(연산군 10)갑자사화 때 폐비 사사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부관참시 되었다가 후에 신원 |
정희왕후(定熹王后) |
1455~1468 |
8 |
예종(睿宗):20세에 복상사하여 승하(1469년). 능은 창릉 |
장순왕후(章順王后) 안순왕후(安順王后) |
1468~1469 |
9 |
성종(成宗):등창과 폐병으로 38세에 승하(1469년), 능은 선릉. 임진왜란 때 왕릉이 파헤쳐지고 불에 태워지는 수모를 겪음 |
공혜왕후(恭惠王后) 정현왕후(貞顯王后) |
1469~1494 |
10 |
연산군(燕山君):중종 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유배, 강화도에서 괴질로 31세에 승하. 능은 없고 묘는 서울 방학동에 있다 |
폐비(廢妃)신(慎)씨 |
1494~1506 |
11 |
중종(中宗):등창과 노환으로 57세에 승하(1544년), 1506년 중종반정, 능은 정릉 |
단경왕후(端敬王后) 장경(章敬王后)왕후 문정왕후(文定王后) |
1506~1544 |
12 |
인종(仁宗):이질로 31세 승하(1545년, 문정왕후에 의한 독살설도 있음). 능은 효릉 |
인성왕후(仁成王后) |
1544~1545 |
13 |
명종(明宗):지나친 방사로 34세에 승하(1567년). 왕대비 문정왕후 섭정, 능은 강릉 |
인순왕후(仁順王后) |
1545~1567 |
14 |
선조(宣祖):임진왜란(1592년 4월) 이후 중풍으로 57세에 승하(1608년). 1597년 1월(정유재란), 능은 목릉 |
의인왕후(懿仁王后) 인목왕후(仁穆王后) |
1567~1608 |
15 |
광해군(光海君):인조반정(1623년)으로 물러난 후 유배.서인이 광해군 폐위,그 뒤 십수년을 더 살다가 제주도에서 63세승하(1641년) |
폐비유(柳)씨 |
1608~1623 |
16 |
인조(仁祖):1623년 인조반정, 청나라에게 항복한 후 홧병 걸림. 신하들 손아귀에서 울화병으로 55세에 승하(1649년), |
인열왕후(仁烈王后) 장렬왕후(莊烈王后) |
1623~1649 |
17 |
효종(孝宗):수전증 있는 어의의 실수로 출혈사. 41세에 승하(1659년,독살설도 있음). 능은 영릉 |
인선왕후(仁宣王后) |
1649~1659 |
18 |
현종(顯宗):청 황제에게 벌금형을 받은 임금. 학질과 과로로 34세에 승하(1674년). 능은 숭능 |
명성왕후(明聖王后) |
1659~1674 |
19 |
숙종(肅宗):어릴적 천연두 후유증,노인병,등창, 심한 당파싸움의 스트레스로 60세에 승하(1720년). 능은 명릉 |
인경왕후(仁敬王后) 인현왕후(仁顯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 |
1674~1720 |
20 |
경종(景宗):안타깝게도 게장을 먹다 급사하여 37세에 승하(1724년), 능은 의릉 |
단의왕후(端懿王后) 선의왕후(宣懿王后) |
1720~1724 |
21 |
영조(英祖):. 영조는 치매와 등창으로 83세에 승하(1776년).장수하다. 1762년 사도세자(思悼世子)를 굶겨 죽임, 능은 동구릉 안에 있는 원릉. 왕은 66세에 어린 신부를 계비로 맞으면서 처녀 후보들(전국의 15~20세 양반가 처녀들)에게 직접 질문을 던졌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어냐?” 어느 처녀가 답하기를 “목화꽃입니다. 비록 멋과 향기는 빼어나지 않으나 실을 짜서 백성을 따뜻하게 해주는 꽃이니 가장 아름답다“는 말에 감복한 영조가 그녀를 왕비(정순왕후)로 간택했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부인(혜경궁 홍씨)는 시아버지 영조에게 처음 들었던 훈계내용까지 “한중록”에 꼼꼼히 기록했다. “세자 섬길제 부드러이 섬기고, 목소리나 얼굴빛을 가벼이 말고(중략)..... 여편네 속옷 바람으로 남편네를 뵐 것이 아니니 네 세자 보는 데 옷을 마음대로 헤쳐 보이지 말고......” |
정성왕후(貞聖王后) 정순왕후(貞順王后) |
1724~1776 |
22 |
정조(正祖):1776년 홍경래의 난, 최초로 안경을 쓴 임금. 등창으로 49세에 승하(1800년,독살설도 있음). 정순왕후 섭정. 신유사옥, 능은 건릉 |
효의왕후(孝懿王后) |
1776~1800 |
23 |
순조(純祖):매독3기로 45세에 승하. 이때 나라는 콜레라 창궐(독살설도 있음).능은 건릉. 순조의 장인 김조순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
순원왕후(順元王后) |
1800~1834 |
24 |
헌종(憲宗):정조의 증손자. 23세에 술과 여자로 보내다 폐결핵으로 승하. 대왕대비.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 수렴청정, 능은 조선임금의 무덤 중에 유일하게 3개 있는 경릉, |
효현왕후(孝顯王后) 효정왕후(孝定王后) |
1834~1849 |
25 |
철종(哲宗):세도 정치에 의해 졸지에 왕이 된 강화도령,1851년 친정, 33세 폐결핵으로 승하. 능은 예릉 |
철인왕후(哲仁王后) |
1849~1863 |
26 |
고종(高宗):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 1919년 67세에 승하(일제에 의한 독살설 있음) |
명성왕후(明成王后) |
1863~1907 |
27 |
순종(純宗):몸이 허약했고 남성 구실을 못했다 함. 1926년 라디오를 들으면서 심장마비로 53세에 승하.능은 유릉 |
순명효왕후(純明孝王后) 순정효왕후(純貞孝王后) |
1907~1910 |
1.조선의 건국
●조선왕조의 성립, 태조 이성계:
고려 공양왕 4년(1392년) 7월 17일. 高麗 왕조는 34대 475년만에 무너지고, 이성계는 왕위를 넘겨받아 새왕조의 태조(太祖)로 즉위. 개경 수창궁에서 30년간 고려의 신하로서 큰 공을 세운 그는 배극렴 등의 신하들에게 58세로 왕위에 추대되었다.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기슭의 두문동(杜門洞,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은 조선왕조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고려 충신들이 숨어들어가 서두문동에 72명의 선비가, 동두문동에 48명의 무인이 살고 있었다. 이성계는 두문동 출신들을 세상에 나오게 하려고 두문동 주위를 섶더미로 둘러싸게 하고 통로만 만들어 놓은채 불을 질렀으나 120명의 충신들은 불속에서 타죽고 말았다.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고려말 3은으로 알려진 목은(牧隱) 이색(李穡)도 몇차례 부름을 받고도 거부했다가 이색의 아들 鐘學은 정도전에게 죽음당하고, 이색도 여주 나루터에서 쓰러져 숨지다.
태조에게 여덟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위로 여섯아들은 (진안대군방우(芳雨),영안대군방과(芳果),익안대군방의(芳毅),회안대군방간(芳幹),정안대군방원(芳遠),덕안대군방연(芳衍)은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해에 떠난 신의왕후 한씨가 낳았고, 아래로 두아들(일곱째, 무안대군방번(芳蕃),여덟째, 의안대군방석(芳碩)은 신덕왕후 顯妃 강씨가 낳았다.
1392년 8월, 태조의 사랑을 독차지한 방석(芳碩)이 세자(世子)로 책봉되자 방원(芳遠)의 불만이 심했다. 이성계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새왕조의 개국을 알리면서 ‘조선’ (옛날 고조선에서 따온 이름), ‘화령’(이성계의 고향 영흥의 다른 이름) 둘 중에서 나라이름을 골라달라고 청하여 명나라에서는 ‘조선’을 선택해 주어서 태조2년(1393년)2월 15일 나라이름을 옛날 고조선에서 따온 ‘조선’이라 정했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다
태조는 유교(儒敎)를 정치교육의 근본이념으로 삼고 불교(佛敎)세력을 억제(배불숭유). 이성계의 악몽으로 도읍을 5백년동안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경(開經)에서 계룡산으로 정했다가 한양(漢陽)으로 천도해 5백여년동안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이씨왕조의 기반이 되었다.
●왕자의 난
방석의 세자책봉 후 정도전과 방원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방원이 군사를 일으켜 세자 방석을 죽인 1398년9월 이복형제간에 제1차 왕자의 난(방석의 난.정도전의 난‘)을 무인정사(戊寅靖社)라 한다. 태조3년(1394년)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원주땅에 유배되어 공양군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삼척에 보내진 공양왕과 그 아들들에게 사약을 내림. 태조4년(1395년)9월 새궁궐이 완성되어 이름을 ‘경복궁(景福宮,큰 복을 누리며 번성하라)’으로, 왕이 조회하게 될 곳을 ‘근정전(勤政殿)’, 왕이 나라일을 보게 될 곳은 ‘사정전(思政殿)’, 왕이 거처하게 될 곳은 ‘강녕전(康寧殿)’이라 함. 대궐 건물과 뜰을 둘러싼 긴대궐의 담에는 4개의 문을 만들어 남문을 ‘광화문(光化門)’, 북문을 ‘신무문(神武門)’, 동문을 ‘건춘문(建春文)’, 서문을 ‘영추문(迎秋門)’이라 함. 태조 5년(1396년)1월에 도성이 완성되어 북으로는 ‘백악(白岳)‘, 남으로 ’남산(南山)‘, 동으로는 ’낙산(駱山)‘, 서로는 ’인왕산(仁王山)‘으로 잇고 있었다. 성의 출입문으로 대문 4곳과 소문 4곳을 세웠다. 4대문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숙청문(肅淸門)’, 동쪽의 ‘홍인문(洪仁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이며, 4소문은 동북쪽의 ‘혜화문(惠化門)’, 서북쪽의 ‘창의문(彰義門)’(또는 ‘자하문(紫霞門)’), 동남쪽의 ‘광희문(廣熙門)’또는 ‘수구문(水口門)’=사람의 주검을 실어나름), 서남쪽의 ‘소의문(昭義門)’이다.
▶제2대 정종: 태조가 심신이 쇠약해지자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세상이 되자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방석의 난으로 방과를 세자로 세운지 태조 7년만에 방과에게 왕위를 넘기니 제2대 정종(定宗)이다.
▶제3대 태종: 방원이 형 방간을 무찌르고 귀양 보낸 것이 동복형제간의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박포의 난’.‘방간의 난’)이다. 정종2년(1420년) 방원을 왕세제로 삼고, 그해 11월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제3대 태종(太宗)이다. 조선은 건국 후 10년도 채 안되어 세 번째 왕을 맞았다. 정종은 상왕, 태조는 태상왕이 됨. 태조는 왕위다툼에 노해 옥새를 지닌채 한양으로 갔다가 금강산을 향해가며 절마다 불공을 드리며 다시 불교를 가까이 하게 됨. 함주(함흥) 귀주동의 태조가 자란 옛집에 태종은 차사를 보내어 옥새를 물려받으려 했으나 찾아오는 차사(差使)들에게는 활을 쏘아 죽이게 되어 “함흥차사(咸興差使)”라 불리게 됨. 무학대사의 권고로 태조는 함흥을 떠나 개경으로 돌아감. 태종은 1404년 도읍을 다시 한양으로 옮기고 ‘창덕궁(昌德宮)’을 지어 태조의 거처로 삼았다. 태조는 태종8년(1408년) 창덕궁 별전에서 건국한지 16년만에 74세로 세상을 떠나 양주(경기도 구리시)땅에 묻히니 ‘건원릉’이라 한다.
2.중앙집권적 정치기구의 정비
▶다져지는 새나라의 기틀
태조 이성계는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세 가지 원칙으로 불교를 멀리하고 유교를 정치.교육의 기본이 되는 이념으로 한다 명나라에 대해서 친선정책을 택해 평화를 꾀한다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농업에 힘쓴다. 태종1년(1401년),5년(1405년)의 체제정비로 도평의사사와 문하부를 합쳐 의정부(議政府)만 남고, 중앙의 권력기관이 없어진 대신에 6조의 권한이 크게 강화됨. 또 중요한 일이 아니면 6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6조 직계제를 만들어 왕이 직접 통제함.
▶신분제도
조선시대의 4계층(양반,중인.상민.천민)이 뚜렷한 신분제 사회로 맡은 일이 다르고 사는 곳이 나뉘고 타계층과는 혼인조차 하지 않음. 상민(常民)들은 과거 준비할 여유도 없었다. 양반(兩班)은 문무관직을 차지할 수 있는 사대부 신분으로, 동반인 분반과 서반인 무반으로, 문무양반의 벼슬은 8등급의 품계로 정1품.종1품.정2품.종2품의 차례로 종9품까지였다. 정3품은 통정대부.정충장군 이상을 당(堂)5관이라 하여 왕의 부름에 따라 조정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있는 대신(大臣)들이었고, 종3품은 통훈대부,어부장군 이하를 당하관(堂下官)이라 함.
▶정치제도와 지방제도
중앙에는 의정부, 그 밑에 6조(曹,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가 있었다. 의정부에는 으뜸가는 벼슬인 영의정(領議政),그 아래 정1품 좌의정,좌의정 아래인 정1품 우의정 등 이른바 3상(三相),또는 3공(三公)이라는 세 정승이 있고, 그 아래 종1품 좌찬성,우찬성, 그 아래는 정2품 좌참찬,우참찬이 있었다. 왕명의 출납을 맡은 승정원은 왕의 비서기관 역할을, 승정원에는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부승지. 동부승지 등 5승지를 두었는데 모두 정3품에 해당. 역모 등 중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義禁府)에는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무관으로서 종5품이었다. 행정 계통의 관아들을 견제하는 홍문관(弘文館).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의 삼사(三司)가 있었다. 전국은 8도로 나뉘었다.
▶군사제도와 교육제도
의흥 삼군부(意興三軍府)가 군사권을 가지고 훈신들이 사병을 거느렸다. 세조 때 5위 도총부(五位都摠府)로 고침. 5위는 의흥위(중위). 용양위(우위). 호분위(우위). 충좌위(전위). 충무위(후위)가 분담된 지방의 병력을 관리했다. 중앙에 4부학당을, 지방에 향교를 운영. 3년마다 치르는 문과(생진과(소과,생원과,진사과),문과(대과), 무과, 잡과(역과.의과.음양과.율과)로 나뉨.
▶토지제도와 사회생활
과전법. 공신전. 세도 때는 직전법.
▶세종대의 번영. 양녕대군의 진심
재위18년 동안 태종에게는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에 4남 4녀(정순공주.경정공주.경안공주.정선공주)로 맏아들 양녕대군 제, 둘째아들 효령대군 보, 셋째아들 충녕대군 도, 넷째아들 성녕대군 종은 스물도 못되어 병으로 죽다.
●황희 정승
양녕대군이 폐위되자 세종이 세자 책봉된 다음해에 양녕 폐위를 반대한 이조판서 황희(27세에 문과급제)를 탄핵 상소.
▶제4대 세종, 슬기로운 임금:
태종4년에 맏아들 양녕대군을 왕세제로 결정했으나 태종이 슬기로운 충녕대군에게 기울자 양녕대군은 이상한 행동을 하므로, 태종18년(1418년) 세자인 양녕대군을 바꾸어 충녕대군(22세)을 세자로 책봉하니 제4대 세종(世宗)이다. 유교사상의 기본이 되는 세가지 윤리의 삼강행실도 편찬(1432년):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
▶제5대 문종(文宗): 세자 책봉된지 30년 만에 즉위한 후 건강이 좋지않아 2년만에 1452년 사망
●계유정난(癸酉靖難)
▶제6대 단종(端宗): 12세의 어린 나이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세조3년(1457년) 강원도 영월로 유배됨(16세). 세종의 6째아들 금성대군은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세조의 사약을 받음(1457년).사육신=성삼문.유응부.하위지.이개.박팽년.유성원.
▶제7대 수양대군이 세조(世祖): 즉위함. 계유정난(1453년)
3.사림의 등장과 사화
●훈구파.사림파
세종20년(1438년) 전후로 집현전은 학문기구에서 정치기구로 바뀌어 감. 4대 세종이 재위 32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5대 문종(文宗)이 재위 2년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나고, 제6대 나이어린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신하들이 왕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음. 제7대 세조(世祖)가 조카의 왕위를 빼앗자 집현전 유학자들중 사육신을 비롯한 조선왕조 성리학의 근거지인 영남지방 유생인 사림(士林)(지방에 근거를 둔 유생들)들이 반발. 훈구파(勳舊派)의 훈신들은 공신이 되어 많은 토지를 받음.
●어진 임금 성종
▶제8대 예종(睿宗): 즉위 1년만에 세상을 떠나자
▶제9대 성종(成宗, 어머니는 인수대비): 자을산군(세자 때 갑자기 죽은 세조의 맏아들 장의 둘째아들)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할머니 정희대비가 섭정(攝政). 원로훈신들(신숙주.정인지.한명희등)이 보좌. 성종7년(1476년) 할머니 정희대비로부터 정권을 이양 받음(20세 때). 재위26년만에 38세로 죽음.
▶제10대 연산군의 횡포:
세자 융이 19세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제10대 연산군(燕山君)이다. 성종8년(1476년)에 성종과 숙의 윤씨 사이에 태어남. 윤씨가 폐출된 후 5년만에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됨. 생모 윤씨는 우의정 윤호의 딸로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입힌 일로 폐비되어 사약을 받고 죽음. 사림파와 날카롭게 대립하던 훈구파가 연산군을 부추겨 연산군4년(1498년)에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킴. 사관 김일손 때 사초에 올린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김종직이 초나라 회왕인 의제가 항우에게 불우한 죽음을 당했던 고사와 비유.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글).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의 머리를 들이받아 숨지게 함. 연산군12년(1506년) 박원종(연산군에게 욕을 당한 누나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가 자결), 성희안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에 유배시킨 두달 뒤 31세로 생을 마감.
▶제11대 중종(中宗): 성종의 둘째아들 19세의 진성대군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즉위. 중종14년(1519년) 38세에 정2품 대사헌, 76명의 훈신들이 거짓으로 얻은 공신칭호와 지위를 없애는 위훈삭제사건을 일으킴. 훈구세력의 모함으로 사림세력은 변을 당함(1519년, 기묘사화), 이황은 중종22년(1528년)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감. 1534년 문과에 급제함.
▶제12대 인종(仁宗): 30세에 즉위. (1515~1545, 재위1544~1545년). 중종은 재위39년 11월에 사망하고 인종이 즉위했다. 大尹(영수인 윤임) 은 득세했다.
장경왕후 윤씨가 왕비 책봉되고 중종10년에 세자 호를 낳고 엿새만에 죽음. 중종12년에 문정왕후 윤씨가 왕비에 책봉되어 경원대군을 낳음(경원대군의 외삼촌, 문정왕후의 오빠들인 윤원로. 윤원형은 세자를 폐하고 경원대군을 왕위에 앉힐 기회를 노림). 조정은 대윤(윤임일파)와 소윤(윤원형일파)으로 대립. 인종에게 아들이 없자 이미 왕세제로 책봉되어있던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줌. 1년을 넘기지 못한 인종의 장례식은 소윤측이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여 승하한지 5달이 채못되는 10월27일로 정했으나 여기서 20여일을 앞당긴 10월15일로 수정하고 그해 8월 사림파들은 '을사사화'로 큰 화를 당했고, 소윤은 정권을 장악했다. 문정왕후(중종비인 대왕대비)와 인성왕후(인종비 왕대비) 두명 중 한사람이 섭정이 가능했는데 문정왕후가 섭정을 맡았다. 야사에는 대비 문정왕후(1501~1565) 윤씨가 인종(재위 1544~1545년)의 독살설을 전한다. 계모 윤씨가 주는 다과를 먹고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인종이 죽고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재위1545~1567년)이 12살에 즉위해 궁중내 인종 지지 세력을 축출하고 국가이념인 성리학을 무시하고 불교를 숭상했다. 인종의 아버지 중종(재위1506~1544년)은 성종의 맏아들이 아니고 둘째아들이라, 왕이 될 수없었고 성종(재위1469~1494)의 맏아들은 폐주 연산군(재위1494~1506)은 폐비 윤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성리학을 거부하고 공자를 모신 성균관을 기생들의 유원지로 삼았다. 공자의 위패를 방치하고 제사를 폐지했다. 결국 사대부들이 1506년 쿠데타로 연산군을 쫓아내는 중종反正을 일으킴.
●폐비 신씨와 두 두 윤씨 왕후
중종의 장인은 연산군 때 좌의정 신수근으로 그는 연산군의 처남(연산군의 부인 신씨가 신수근의 여동생)이었다. 신수근은 누이와 딸중 연산군을 선택하므로 반정세력에 처형됨. 중종의 부인 신씨는 반정 7일만에 왕비에서 폐비로 쫓겨남. 아듬해 윤여필의 딸이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오빠 윤임,대윤)이다. 그는 1515년 아들 인종을 낳고 7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자는 사림파와 윤지임의 딸(문정왕후 윤씨)이 계비로 간택된 지 17년만에 경원대군을 낳고 小尹을 만들었다. 세자를 지지하는 大尹과, 경원대군을 지지하는 小尹(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간의 왕권당쟁이 벌어짐. 문정왕후가 쥐꼬리에 불을 붙여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에 불이 남('灼鼠의 變')은 어머니와 후사가 없는 세자의 위험을 말해준다. 이질에 걸려 8달만에 죽다. 대윤과 사림파는 몰락하고 13대 명종을 섭정한 문정왕후의 시대는 암흑의 날이었다. 사대부들이 반발한다.
▶제13대 명종(明宗): 12세로 즉위. 8년간 어머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다. 조정의 실권은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 일파(소윤)에게 돌아감. 대윤(윤임일파)를 제거한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명정17년에 처형되어 정적 골패의 우두머리는 경기도 양주의 고리 백정인 임꺽정은 황해도,경기도,평안도,강원도까지 세력이 미침.
동인.서인: 1567년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는 13살에 요절하고, 아들없는 명종이 2년뒤에 죽자 제11대 중종의 손자 하성군(덕흥군의 셋째아들)이
▶14대 선조(1552~1608,재위1567~1608): 즉위, 41년간 재위했다. 조정의 문신들이 신진사류 김효원(도성 동쪽에 있다고 동인.이황의 학문을 따르는 영남학파)과 영남의 젊은 학자들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도성 서쪽에 있다고 서인. 이이(병조판서 때 10만양병설을 주장)의 학문을 따르는 기호학파)의 나이 지긋한 사대부들의 반목으로 당파생김. 이이의 가르침을 받던 학자 정여립이 이이가 서인으로 몰리자 동인편으로 갔다가 역모사건이 일어나 (이이가 죽은 1584년.49세) 동인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함. 선조20년(1587년) 쓰시마섬 도주에게 “조선왕이 내앞에 와서 충성을 맹세케 하라“. 선조22년(1589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신을 보내어 조선사절을 일본에 보내달라고 요청. 선조23년(1590년) 조선사절단(정사에 황윤길(야당인 서인), 부사에 김성일(집권당 동인)을 보냈는데 황윤길은 ”왜국이 이 땅을 넘보지 못할 듯“이라고 보고, 김성일은 황윤길 보고와는 달랐다. 민심이 소란하게 될까봐 그랬다고 한다. 조선개국 200년 만에 일어난 임진년-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 4월13일 ”명나라를 칠테니 조선의 길을 빌리라“는 침략의도로 10만 왜군이 부산진성으로 몰려옴.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선발부대에 전사한 부산진첨사 정발이 활로써 대항. 동래부성으로 몰려든 왜군은 다대포 첨사 윤충신도 죽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도망침. 동래부사 송상현도 칼에 죽고 이어 양산, 김해도 무너짐. 경상좌병사 이각은 도망침.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의 군사가 패하고 자결하자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피난가기로 해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과 선조는 평양쪽으로 피난가고, 다른 왕자들은 강원도, 함경도로 피난하자 백성들은 텅빈 대궐을 약탈하고 불질러 경복궁과 창덕궁이 불탐. 당파싸움만 하던 대신들의 집에 불을 댕김. 노비들은 노비문서가 있던 장예원과 형조에 불을 지름.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지 20일도 안되는 5월 2일에 한성이 빼앗김. 임진년 6월 보름쯤 기다리던 명나라 구원병 7천이 왔으나 평양성싸움에서 패해 5천군사를 잃고 요동으로 돌아가 버림. 그해 12월 명나라 이여송의 4만군사가 대포로 평양을 공격해 탈환. 한성이 점령된지 3개월이 못되어 왜군은 함경도 회령까지 이름. 육지의 참패에 선조24년(1591년 2월)전라좌수사가 된 이순신은 문종 때의 철갑선을 토대로 거북선을 임진년 3월말~4월초에 완성. 옥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양해전에서 총상을 입다. 당포해전,견내량해전,한산대첩,안골포해전 승리. 그해 8월 경상.전라.충청 수군을 총지휘하는 3도수군통제사가 됨(한산도가 3도수군의 본거지), 명량해전, 노량해전에서 총상을 입고 선조31년(1598년) 11월18일, 54세로 죽음. 7년간의 전쟁.
▶제15대 광해군: 선조는 박응순의 딸인 첫번째 부인 의인왕후 박씨는 석녀였고,1608년 2월 선조가 죽고 공빈심씨 소생으로 둘째아들이 즉위. 인빈김씨를 총애한 선조는 신성군에게 뜻이 있었고 두 정승은 광해군에게 뜻이 있었으니 광해군이 즉위했다. 공빈심씨의 첫째아들인 임해군은 목졸라 죽임. 인목대비의 적자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떨어져 강화도 유배됐다가(8세때) 뜨거운 장작불로 뜨겁게 달아 올려 죽게 됨.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도 서인으로 떨어져 서궁에 갇혔다가 홍천에 유배됨. 그동안 소북파의 권세가 대북파를 내몰고자 했으나 영의정 이원익 등 대북파가 대거 등용함. 대북파는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감싸고 서자 광해군을 몰아내려 한다는 상소를 올려 사약을 받음. 죽림칠현의 7명의 서자들이 벼슬길을 원한다고 상소했으나 불허되므로 도둑이 됨. 동의보감의 허준은 용천의 부사인 허윤의 아들로 명종1년(1546)에 태어나, 20세에 의과에 급제하고 어의로 지내다가 광해군 7년(1615)11월, 70세로 세상을 떠남.
▶제16대 인조(仁祖): 대북파에 대립했던 서인들이 광해군15년(1623년) 3월 13일밤 거사하여 광해군의 조카 능양군을 임금으로 모시니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조(仁祖)가 즉위. 광해군은 제주도로 옮겨 67세로 죽음. 광해군의 왕비 유씨는 자살. 세자와 부인 박씨 등은 강화도로 귀양. 폐세자는 사약 받고 폐세자비 박씨는 자결. 인조4년(1626년) 7월에 후금의 누루하치가 죽고 태종이 왕위에 오름. 인조5년(1627년)1월 13일 후금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쳐들어옴. 주화론자와 척화론자의 논쟁. 후금은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1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 인조15년(1637년)1월 30일 仁祖는 삼전도(서울 송파구 삼전동)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9번 머리 숙여 항복(降伏)의 예를 행하고 인조의 세자, 둘째왕자를 청나라 인질로 보내고 매년 조공을 바치기로 함.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끝남. 40일간의 전쟁이 끝나자 청나라 군사들이 소현세자(1612~1645), 봉림대군 등 두 왕자와 척화파의 선봉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三學士를 붙잡아 청의 수도 심양으로 데려갔다. 병자호란 후 서인들은 노론, 소론으로 나뉘어 다투었다. 소현세자가 죽은지 4년후인 1649년 인조가 죽다
▶제17대 효종: 봉림대군이 즉위하니 제17대 효종(孝宗)이다. 그는 소현세자의 동생이다. 무치에 치중하고 북벌을 계획하다. 효종은 친청파를 몰아냄. 효종10년(1659년) 발등의 종기악화로 41세에 세상을 뜨다.
●예론싸움: 제18대 현종(顯宗): 선조초기에 생긴 당파는 동인(남인. 북인으로). 서인(대북,소북으로)이 다툼. 인조반정으로 서인세력이 커짐. 반정에 공이 있는 훈서파와 그렇지 않은 청서파. 효종의 어머니 조대비의 복상문제(상복을 송시열등 서인은 1년간, 남인은 3년간 입는게 옳다는 주장),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죽자 복상문제(상복을 서인은 9개월간, 남인은 1년간 입는 게 옳다고 주장). 현종은 남인주장을 받아들여 서인들이 귀양 갔다. 조정은 남인 차지가 되었다.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뉨. 1674년 8월, 38세로 세상 떠남.
▶제19대 숙종(肅宗): 14세의 나이로 즉위. 조정은 남인들의 차지. 서인 우두머리 송시열을 죽여야 한다는 청남파와 송시열을 반대하는 탁남파. 숙종은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의 아들대신 둘째아들 효종에게 왕위계승된 것을 보고 못마땅하게 여겨 예론에 대해 상소하는 것을 엄금했다. 그런데 남인들의 세력이 커지자 서인들을 등용했다. 서인들의 판세가 커지자 노론, 소론으로 갈렸다. 숙종은 서인들이 억지로 추천한 중전(인경왕후 김씨)과 사이가 좋지 않자 후궁 장씨(장옥정)를 맞이함. 명성대비가 죽자 숙종은 헤어진지 3년만에 다시 장씨를 불러 숙원에 봉함. 인경왕후가 20세로 죽자 장례가 치르기 전에 장씨의 처소에 들렸기에 숙종어머니(명성대비)가 장씨를 궁중에서 내쫓음. 장씨는 신분이 낮은 집안의 딸로 조정에서 밀려난 남인편이므로 쉽게 쫓겨남. 다음해 서인의 거두 민유중의 딸이 중전이 됨.
첫 왕비였던 인경왕후의 숙부 서포 김만중이 귀양가다. 숙종14년(1688년)10월 중전이 됨. 계비로 들어온 인현왕후 민씨는 15세로 장씨가 아들을 낳자 원자로 삼고자하나 서인들이 반대했으나 강행.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 서인의 노론측 송시열이 반대상소를 올리자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가 사약받고 죽음. 장희빈은 민씨를 모함해서 폐위케 함. 마침내 장희빈이 중전이 되고 오빠 장희재는 훈련대장, 죽은 장희빈의 아버지는 옥산 부원군에 봉해짐. 서인의 소론파가 정권을 잡자 중전 장씨의 비행이 숙종에게 폭로되자 빈으로 강등되자 폐비 민씨를 다시 중전으로 맞이함. 장희재를 제주도로 귀양 보냄. 숙종27년(1701년)중전 민씨(인현왕후)가 죽자 장희빈의 거처 취선당에서 신당에 무당굿을 함이 알려져 장희빈을 자진케 했다가 사약을 내림. 소론파가 귀양 가고 파직되자 소론이 조정에 대거 진출함. 1720년 46년간의 통치를 마감하고 60세로 세상을 떠남.
●19대 숙종의 두 왕자:
▶제20대 경종(景宗): 희빈 장씨가 낳은 세자 균은 33세로 즉위하니 경종(景宗)이다. 병이 깊고 아들이 없음.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가 낳은 연잉군 금은 경종1년 (1721년)에 왕세제에 책봉.
▶제21대 영조(英祖): 1724년 경종이 죽자 영조가 즉위함.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 가운데 생명의 위협속에 왕위에 오름. 우선 소론을 몰아내고 노론을 등용한 뒤 탕평책을 씀. 다시 노론을 몰아내고 소론을 등용함. 영조4년(1728년) 이인좌 일파가 역모추진했으나 진압. 탕평갓, 탕평옷, 탕평띠라는 유행어가 생김. 암행어사 박문수의 공로가 큼. 금주령(영조34년,1756년7월 2일)내리다. “술을 만든 자는 귀양보내고 마신 자는 노비로 만들며 중인, 서민이 어명을 어기면 엄한 벌을 내린 뒤 수군에 복무케 하라”(금주논음(禁酒論音). 52년간 재위.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굶겨죽인 사건. 영조의 왕비(정성왕후 서씨)가 아기를 못낳자 후궁(정빈 이씨)이 낳은 효장왕자가 세자에 봉해졌으나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남. 이어 영빈 이씨가 낳은 장헌왕자가 2세때 세자에 봉해진 10세때 혜빈홍씨가 가례. 영특한 장헌세자는 책을 읽고 곧잘 아버지 영조에게 질문하니 영조는 자신의 덕이 없어 그런 것인가 하고 괘씸한 생각이 들자 영조25년(1749년) 15세된 세자에게 임금을 대신하여 나라일을 맡겨보자 세자주위에서 못마땅히 여긴 영조의 계비(정순왕후 김씨), 영조의 후궁(숙의 문씨)등이 세자를 모함하자 세자에 대한 나쁜 소문탓에 영조는 세자를 의심하게 됨. 초조해진 세자는 몰래 평양나들이를 하며 아버지에 대한 불안감을 보였다. 더욱 방탕해진 세자에게 영조38년(1762년)5월 장헌세자가 소론파와 모의하여 임금을 내쫓으려 하는 고발로 형조판서(윤급)의 집을 드나들던 나경언의 투서로 세자를 폐서인하고 큰 뒤주속에 넣고 못을 치고 큰돌을 올려놓음. 7일만에 세자가 죽자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호를 내리고 폐서인의 명령을 거둠. 사도세자가 죽자 동정하는 시파, 반대하는 벽파가 생김. 사도세자의 네아들. 외할아버지 홍봉한이 한성상인들에게서 외상물건을 가져다 외손자들에게 준 것이 문제되어 사도세자의 아들중 은신군, 은언군은 제주도로 귀양보내고 홍봉한은 폐서인이 됨.
▶제22대 정조(正祖): 영조가 세상을 뜨자 사도세자와 혜빈홍씨 사이의 왕세손 산이 임금이 되어 1776년 3월 정조가 즉위. 정조의 아우 은전군을 임금으로 세우려던 홍술해의 아들 홍상범의 역적모의가 탄로남. 정조는 홍국영(세손이던 정조를 벽파의 위협에서 보호)에게 나라일을 맡기자 세도정치가 시작됨. 홍국영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냄. 정조의 왕비 김씨가 아이를 낳지 못해 누이 원빈홍씨를 들였으나 얼마 안돼 세상을 떠남. 1776년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지음.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지음. 서학 천주교의 전래(이승훈).
▶제23대 순조(純祖): 본격적인 천주교 박해. 순조1년(1801년) 신해사옥 생김. 정조의 몸에 종기가 나서 세상을 뜨다. 정조와 박씨 사이에 난 순조가 11살에 왕위 즉위. 영조의 둘째왕비로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하다. 1802년 순조는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음. 정순대비는 경주김씨 집안에서 왕비를 맞으려 했으나 순조의 어머니가 순종박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함. 순조5년 정순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경주김씨는 조정에서 밀려나고 대신 안동김씨가 세력을 잡다. 임금의 장인인 김조순은 나이어린 순조를 곁에서 모시며 세도정치. 안동김씨의 세도는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 전정, 군정, 환곡의 삼정(三政)
▶제24대 헌종(憲宗):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에 즉위함. 순조의 왕비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 헌종이 15세 되던 1841년에 직접 나라 일을 돌보다.
▶제25대 철종(哲宗): 1849년 6월 헌종은 자식없이 세상을 떠나자 가까운 왕실친척으로 강화도에 살던 원범이 (정조의 동생 은언군의 손자였다)왕위를 이어 19세 때 즉위. 안동김씨 김문근의 딸이 철종왕비가 됨. 대를 이을 왕자없이 35세에 세상 뜨남.
▶제26대 고종(高宗):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가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흥선대원군)과 결탁하여 그의 둘째아들 명복을 세워 고종이 즉위. 대비 신정왕후 조씨가 정치하다가 흥선 대원군에세 섭정을 위임. 고종1년(1864) 동학의 최제우는 대구 감옥에서 처형되다. 원래 고종은 조선의 26대 왕이나 재위기간 중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가 됨.
▶제27대 순종(純宗): 순종은 재위(1907~1910. 8), 대한제국 최후의 황제. 고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명성황후 민씨. 1875년(고종 12) 2월에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897년에 대한제국 성립후 다시 황태자에 책봉. 1907년(융희 1) 일본의 압력과 이완용 등의 강요로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지고 고종이 퇴위를 당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 1910년 8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연호는 융희(隆熙)를 사용. 같은 해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였고, 이에 따라 일본인의 한국 관리 임용을 허용하여 사실상 국내정치는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감. 8월 1일에는 다시 일본의 압력으로 한국군을 해산, 12월에는 황태자가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고,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을 허가하여 경제침탈의 길을 열어줌. 1909년 일본은 한국의 민정(民情)을 살펴가며 국권탈취공작을 추진하여 7월에 군부(軍部)를, 10월에는 법부를 각각 폐지하여 나라를 일본 통감부 기능 속에 흡수. 일본은 순종을 창덕궁에 머물게 하고, 이왕(李王)이라 부름. 1926년 4월 25일 창덕궁에서 생을 마침, 능은 유릉(裕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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