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에이지운동의 도전
컨콜디아신학교교수:지원용
현대의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나타나는 "복수 현상(plurality)" 종교계에도 나타나고 있으며,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과거에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오늘날은 그 문제의 복합성이 생각 이상으로 대단하다. 안팎으로 오는 도전의 물결 가운데 한가지를 과거와 비교하면서 서술하려 한다.
요한 1서4장6절에 나오는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이라는 말에 특별히 주목하고 싶다. 이 말씀의 배경 또는 사도 요한의 첫째 편지가 쓰여진 당시의 사상적 배경으로는 바벨론, 애굽,페르샤, 인도 등 이른바 동양 종교사상과 신화 그리고 옛 희랍 철학사상 등의 혼합주의였고 극히 합리적인 종합 종교이며, 보편적 성격과 복잡성을 겸한 노스티스즘(Gnosticism:영지주의)이 있었다. 이 이단사상이 침투하여,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팔레스틴에서 희랍과 로마의 세계로 전해지기 시작한지 아직 역사가 길지 않은 때에 큰 위협을 가하여 오고 있었다. 영지주의 사상은 우선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그리스도론'에 대한 전면 도전이었고, 기독교의 윤리의싯을 크게 위협한바 있었다. 그후 200년 가까이 교회 안에서 극성을 부리면서 그리스도교의 공동체 가운데서 이단적이며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세했다. 그 이후에도 영지주의적 경향은 기독교사와 신학역사에 있어서 계속 문젯거리를 주고 있다.
I. '뉴에이지운동'이란 무엇인가 ?
20세기를 마무리 하면서 21세기를 바라보고 있는 이때 새로운 20세기판 노스티스즘이 일어나고 있다. 그 복합성이나 복잡성, 내세우는 현실성이나 신비성, 혼합적 종교성과 무속성, 그리고 정통 기독교에 대한 도전성 등 지난날 그렇게도 끈질지게 기독교에 달려 붙던 영지주의를 연상케 하는 것이 있는데, 이른바 '뉴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이라는 것이다. 내용으로 보아 옛 영지주의와 다른 점도 있으나, 유사점이 너무나 많다.
뉴에이지 운동은 우선 어떤 한 교조나 지도자에 의하여 이루어진 "종파"나 좁은 의미에서의 "종교"라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운동"이다. 그러기에 더 복잡성을 띨 수 있고,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층의 관심을 끌 수 있고,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층과 지식인 층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요인이 많다. 학자들과 문필가, 예술가 등이 있는가 하면, 셜리 맥클레인 같은 널리 알려진 영화배우도 있다. 그들은 여러 종류의 글을 발표하였다.
뉴에이지 운동이 얼마나 매력적이며 시대적인 표어인가! 현혹하게 매우 알맞는 이름이다. 이 이름의 뒤에는 기독교에서 용납할 수 없는 여러가지 사상이 내포되어 있음을 명심하고 경계해야 될 것이다.
뉴에이지운동은 여러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철학으로서, 휴머니즘으로서, 신비주의로서, 생활철학으로서, 건강과 치병 수단으로서, 예술과 음악으로서, 정신집증 수단으로서, 혹은 무속적 종교로서, 원 하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난다.
II. 서양문명의 위기
뉴에이지 운동의 발생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밑에서 여러 세기동안 내려온 현대 서방세계의 고민점과 약점과 쇠토현상을 명백히 나타내주고 있다. 서방 세계는 피곤을 느끼고 물질문명에서 오는 여러가지 모순과 부조리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사상적으로 종교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다. 그와 같은 싹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서방세계에 대한 비판이나 후퇴와 위기를 외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은 아니다. 많은 역사 비판가들과 문명 비판가들에 의하여 이야기된 바 있다. 이미 20세기초 오스왈드 스펭글러(Oswald Spengler 1880-1936)같은 사람은 [서양의 몰락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이라는 책에서 흥미있는 관찰을 한 바 있다. 자연세계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거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문명이 그와 같은 단계를 거친다는 것인데, 이른바 서양문명이 봄과 여름을 거쳐서 가을에 다다랐다는 말이다. 그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이미 19세기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그 많은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유럽과 미국에 걸쳐 지성인들의 흥미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영국의 유명한 역사비판가 아놀드 토인비의 글이나,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의 글 역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의 사상가요 무교회주의 운동 창시자인 우찌무라 간조(1866-1930)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세속주의와 현대문명의 물결과 파산한 서구의 기독교 원리(Failure of the West in living up to the christian principle, under secularization and modernizati on)"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 나타난 것이 종교와 종교적 현상 및 종교생활이었다. 종교는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하여 계속되어온 것이다. 그리고 종교는 인간문화의 기초와 기반이 되어 문화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여 왔다. 그런가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화는 이른바 문명으로 탈바꿈을 하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것으로써가 아니라 그 형태의 변화 내지 인간 생활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 등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게 된다. 그런 점으로 볼때 문명은 문화의 산물이라 하는 것이 타당성이 있다. 어떤 문명이든 영구히 계속하는 것은 드물었다. 그 이유는 인간문명은 시간이 감에 따라 후퇴하고 몰락현상에 이르게도 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인간의 정신적, 영적 생활 및 도덕적 가치관이 부패하게 되고 그 대신 물질주의와 쾌락주의가 사람들의 삶을 주관하게 될 때 문명은 반드시 후퇴하는 것이며 결국에는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류 역사에서 한때 화려하던 문명이 영구히 땅에 묻혀 버리고 이제는 고고학자들의 학문연구의 관심거리 정도로 남아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모르나, 알베르트 슈바이낫 자신의 책[문명의 철학] (1960)에서 인간문명의 윤리적 성격을 특별히 강조한 바 있다. 그는 문명이란 인류의 복지와 향상과 발전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했다.(Civilization consists in our giving ourselves for the advancement and progress of human welfare). 현재 되어가는 여러가지를 종합하여 볼 때 온 인류가 당하는 문제나 어 려움은 말할 것도 없겠으나 지난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이래 온 세계를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이른바 선진문명, 선진국가라는 대명사를 갖고 발전해온 서방세계가 당면한 여러가지 문제를 잘 알 수 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일어나는 현상들을 하나하나 들어서 관찰할 수 있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의 작가 솔제니친의 충고가 생각난다. 그는 어떤 민족과 문명을 뒷받침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물질 발전에 앞서 '윤리의식'에 있다고 했다. 어쨌든 서방세계는 많으니 문젯거리를 안고 쇠퇴현상에 이르렀다고 하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서방사회의 정신세계는 특별한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그 서방세계의 정신적, 영적 생활의 지주역할을 하여 온 것이 이른바 유태교-기독교(Judeo-Christian)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2천년 역사를 내려오는 동안 여러 가지 굴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서방 기독교가 그들의 정신생활의 구심점이 되었고 구심력 역할을 하여 왔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당면한 문제가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되는 것은 이와 같이 오랫동안 기독교의 영향 밑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하는데 앞장섰고, 특히 지난 2,3백년 동안은 선교하는 일에 온갖 힘을 집중하여 힘써 온 서방세계내의 정신문화와 종교생활 가운데 염려할 만한 질병이 생기게 되었다는 점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에게 어떤 질병이 있게 될때 그들의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받아온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가 일어날 것이냐 하는 점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서방국가의 정신세계의 약화나 몰락현상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오게 될 것이다. 이른바 뉴에이지운동의 발생의 원인을 생각할 때 미국 사회 현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III. 뉴에이지운동의 활발한 움직임
뉴에이지운동의 사상적 배경은 1,2백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미국에서 표면화하기 시작하여 대중 속에 (교회를 포함)깊이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로 볼 수 있다. 1960년대 중반에 아시아인들에 대한 미국 이민법의 개정으로 많은 아시아 사람들의 이민 붐(boom)이 일어나게 되었다. 잘 아는대로 이민법 개정의 결과로 수많으니 한국 사람들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 이민들 가운데는 특히 힌두교 계통의 종교 지도자들(Guru)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미국에서 적극적인 포교에 나섰다. 미국 안에는 그렇지 않아도 기성 기독교에 관심 약화되어 가고 있고, 아울러 전통 가치관과 윤리관의 몰락, 폭력과 마약의 성행, 그리고 한계를 모르는 자유와 욕망의 세계 등, 정신적 영적으로 지칠대로 지친 서방세계 특히 미국 사회의 새로운 관심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계층 사람들이 흥미를 갖고 이른바 동방종교들(동방영성 등) 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뉴에이지운동은 현대인의 복잡다단한 문제를 해겨하여 줌으로써 만족을 줄 수 있는 길을 동방 종교 사상과 그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2천년동안 이끌어온 유대교-기독교 중심의 서양 세계관에 깊은회의를 나타낸다. 출발점과 방향의 전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른바 필연적인 "보기의 변화(paradigm shift)"라고 볼 수 있다. 그 출발점의 기초를 힌두교에 둔다고 말하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그 이상 더 넓은 폭을 가졌다고 본다. 어쨌든 뉴에이지운동의 가르침의 주요 부분은 힌두교의 범신론적 교리를 짙게 풍기고 있으며 여러가지 사상(동학사상 참고) 복합된 혼합성을 지니고 있다.
IV. 뉴에이지 운동의 내용
뉴에이지운동의 가르침의 내용 가운데 몇가지 중요한 점만을 추려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1. "당신은 신이다."
뉴에이지 운동의 가르침 가운데 크리스챤인 우리들의 큰 관심을 끄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신에 대한 이해이다 (범신론). 뉴에이지운동은 힌두교의 최고 신인 브라만을 생각하며, 인간은 모두 브라만을 생각하며, 인간은 모두 브라만의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힌두교 자체가 범신론이요 다신교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힌두교에는 3,300만의 신이 있다고 한다. 수 많은 신이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든다면 최고 신인 브라만은 발전소와 같고 개개 인간은 친구와 같다는 말이다. 모두가 브라만에 연결되어 있도 브라만의 일부라는 말이다.
(참고:철학자 B.deSpinoza, 1632-77; G.Bruno, 1548-1600,Campanella, 1568 -1639).
모든 인간은 신인데, 바로 "당신은 신이다"라는 말이 된다. 이런 주장은 창세기 3:5절을 생각나게 하는데, 하나님처럼 되기 위하여 처음 인간을 유혹한 자는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처럼 되기 위하여 그의 명하심을 거역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창조자와피조물의 관계에 이상이 생기도록 한다. 사실, 뉴에이지운동 자체는 이른바 일원론(Momism)인데 모든 것은 하나요 한개의 원천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신은 모두요, 모두는 신이라는 뜻이다.
비인격적인 힘을 주장하는 범신론이다. 물론 이런 가르침은 유일신과 인격적인 신을 가리키는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뉴에이지운동의 입장에서 본다면 소외당한 민중(Dalit) 과 천민계층을 위하여 희망의 서광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부정당한 위치에서의 신의 위치로 올려 놓았다는 말이 된다.
이상의 관점은 기독교의 가르침 혹은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우선 성경은 창조자와 피조물을 명백히 구분할 것을 말하고 있지만, 뉴에이지운동은 인간과 창조주를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것 같이 보인다. 우선 에스겔 28:2절은 인간은 신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강조하고 있으며, 이사야 45:8-16절은 역시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계시며 인간이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사야 47:8-10절 특히 10절에서 이 세상에는 야훼 하나님 밖에 다른 분이 신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로마서 1장21-32절에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또는 구분하지 않으려는데서부터 오는 결과가 어떨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이상과 같은 뉴에이지 운동의 징후를 발견할 수 있다.비교적 최근부터 나오기 시작한 정신 세계사의 출판물들을 일선 목회자들의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훌륭하게 번역,편집, 출판된 이 도서들은 많은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의 관심을 끄는 모양이다. 어떤 것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는 말도 들었고 연극화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버스 정류장의 출판물 매점까지에 진열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책들의 내용이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정도는 목회자들이 꼭 알아야 할 줄 안다. 범신론적 사상과 힌두교 불교적인 교리가 그 기반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두가지 실례로서 미국에 있는 슈피즘(Sufism Reoriented,Inc.)의 출판물인 [꼬마성자(원명:The Search for the King)]와 스리라마재단의 출판물인 [성자가 된 청소부(원명:Sweeper to Saint)]를 들수 있다. 지난 3월중손에 서울에서 모였던 정의, 평화, 창조, 질서의 보존 세계대회(JPIC) 기간중 독일의 철학자 바이체커 교수와 김지하 시인의 대담에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는 점이 언급된 것이 주목할 만하다. 이런 점에 관련지어 우리나라 동학의 가르침인 "인내천"의 사상을 주목할 만하다.
2. 윤회설
뉴에지운동의 가르침 가운데, 모든 인간은 다시 난다. 곧 윤회란다는 것이 있다. 이 윤회설은 불교나 힌두교에서 가르쳐 온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으로 끝장인가. 어떤 형태로 계소될 것인가 또다시 이생으로 환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른바 환생금세 라는 말이다. 죽음에 관한 수수께끼 또한 거기 관련된 문제와 공포심 등은 모든 인간의 관심이요, 수수께끼이다 어떻게 하면 죽음의 공포 속에서 전율하는 현대인들을 안신시켜 줄 수 있을까 하는 점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윤회설 그자체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게 된다. 몇해 전 미국에서 행한 어떤 설문조사에서 25%가 윤회설을 긍정적으로대답하였다는 것을 보았다. 주의를 끄는 것은 이 가운데 많은 숫자의 크리스챤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약 1년전 어떤 기회에 50명의 교인들에게 문의를 했는데, 그 가운데 8명이 윤회설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대답하고, 20명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응답하고, 나머지는 부정적인 대답했다. 물론 비율적으로는 적다고 할지 모르나 크리스챤들의 이와 같은 반응은 우리의 주의를 끌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문제가 역시 성경적으로 설명되고 해답되어야 한다. 이점은 독자들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3. 의식훈련 혹은 정신집중 훈련
뉴에이지운동은 초점과 조화를 이룬 인간의 마음과 생의 중심을 잡아 준다고 하면서 이른바 의식 훈련의 중요성과 정신통일을 중요시한다. 그리하여 힌두교들들이 하는 요가 훈련이나 선불교에서 행하는 좌선,TM, 마인드 컨트롤, 명상, 등 여러가지를 들 수 있다.
4. 뉴에이지운동의 중요한 관심을 차지하는 것은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정신세계와 물질세계, 이생과 저생의 연결 혹은 어떤 신적인 황홀경이나 신비경의 체험, 무아상태에 이른 것을 시행하는 이른바 차넬링(channeling) 이라는 것이다. 무속종교에서 언급하는 무당, 점술사, 치병자, 마술사, 샤만 등과 비교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 문제 역시 성경적인 밝힘과 시정과 설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인 것이다.
5.뉴에즈운동은 거창한 목표를 내세우고 있다. 인간의 신격화는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세상, 악과 부조리와 불안과 질병과 죽음이 없는 황금시대, 한 이상시대를 뜻하는 "Aquarius) 의 시대" 구현될 것이라고 말한다. 글자 그대로 새로운 유토피아가 도래한다는 말이다.
이상의 다섯가지는 물론 뉴에즈운동의일부요 전체는 아니다. 그밖의 여러가지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상과 같은 뉴에이지운동의 거창한 도전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 모두가 큰 과제이기 때문에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뉴에이지운동 자체의 문제도 문제려니와 그들이 가르키고 있는 가르침에 직접 간접으로 동조하는 많은 지식인과 종교인들, 예술인들을 말할 것도 없고, 크리스챤을 생각할 때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의 몇가지 제안은 물론 완벽한 제안은 못된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출발할 것이냐 하는 점을 염두해 두고 관심있는 모든 크리스챤들의 기도와 염려와 지혜로운 판단과 연구에 맡길 수밖에 없다.
1) 성경연구에 계속 역점을 둘 것
기독교의 유일한 경전이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야말로 뉴에이지운동이 제기한 모든 질문과 가르침에 대한 대답이요 대답의 원천일 수밖에 없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성경 연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의 세계성에 각별한 관심과 역점을 두고 전달해야 하겠다.
2) 오늘의 교회는 '윤리 부재'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은 크리스챤의 "life style" 을 개발하여 세상의 "본"이 되어야 한다.(빌2:5,3:17,살전1:7) 몇 만명 밖에 안된다는 이단 종파나 진리를 왜곡하는 그릇된 사람들이 전체사회를 뒤흔드는데, 1천만명 크 리스챤들은 무엇하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3) 극심한 교파주의나 교회 분열 경항은 뉴에이지운동 같은 이단 사상운동을 부채질한다. 뉴에이지운동은 기독교의 뿌리를 흔들고 있다.
토끼 세마리가 감자 두개를 놓고 나누는 문제로 싸우고 있는데, 굶주린 호랑이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감자는 말할 것도 없고 네 놈 셋 모두를 먹어야 하겠다.!" 고 하는 것 같은 절박한 현실이다.
4) 우리는 뉴에이지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인간의 가치에 대한 견해에 주의를 해야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은 높고 낮음이 없으며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식하고 그대로 삶에 반영시켜야 한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 받은 자유인인 동시에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하는 봉사자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5)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크리스챤으로서 구비하여야 할 빛과 소금의 사명을 충실히 실천하도록 힘써야한다. 개인생활, 가정생활, 사회생활에 실제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이 점이 실패할 때 뉴에이지운동같은 두려운 사상이 우리를 위협하게 된다. 기독교는 윤리종교는 아니지만 윤리적 종교임을 기억하고 이에 따르는 종교(신앙) 생활이 일반 생활면에 직접 반영해야 될것이다. 기독교가 우리나라 사회의 정신적, 윤리적 도덕적 지주 역할을 못하게 될 때 다른 종교가 대신하게 되고, 기독교는 점차로 외면 당하게 될 것이다.
6) 복음으로 완전 무장하는 일이다 (엡6:10 이하 딤전6:12) 방어와 공격에 있어서 필요한 "하나님의 전신감주"를 입고 담대히 증거하고 악과 더불어 싸우는 일이다.
21세기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하다. 그 가운데는 거창한 종교적 도전들도 많을 것이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 같은, 일어났다가 곧 시들어지는 비교적 단순한 사이비 종파들이 아니라. 이해하기 힘들고, 분간하기도 아리송하고,다루기도 만만치 않은 고도의 복합성과 복잡성 그리고 합리적 이론을 겸한 매혹적인 "미혹의 영"들이 날뛸 것이다. 과연 뉴에이지운동은 우리 모두의 경각심을 일으켜 주는 혼합사상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의 한두 가지 교리에 도전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자체와 그 존재 이유를 뒤집는 거창한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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