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한성공회 (약칭 '성공회', http://www.skh.or.kr) : 영국의 국교회가 한국에 설립된 성공회
▲ 대한성공회 로고
1885년 중국 선교사인 신부 울프(Wolfe,J.R.)가 2명의 선교단을 구성하여 부산 에서 2년간 선교활동을 벌인 이후, 1889년 9월 29일 캔터베리 대주교 벤슨(Ben son, E.W.)이 영국해군 군종신부로 한국교구 초대 주교인 고(高)요한(Corfe,C.J.)을 보냄으로써 본격적인 한국 선교가 시작되었다.
영국인과 미국인으로 구성된 선교단을 조직하여 한국에 도착한 고요한은 의료교육과 문서활동을 통한 선교활동을 전개하여 1891년 3월 6일 서울 충무로에 선교본부 부활의 집을 짓고, 5월 17일에는 낙동성당을 축성하였다. 1893년 강화도 선교를 시작하였고 1910년대에는 경기·충청·황해도 등지에 교회를 세웠다. 초기 선교에서는 1891년 인천 성누가병원, 서울 성마태병원, 진천 애인병원, 여주병원처럼 전국 규모의 병원을 개설하는 등 의료활동이 두드러졌으나, 1940년 일제의 기독교 탄압으로 모두 문을 닫았다.
출판 및 문화사업으로 인쇄소를 설립하여 서양문화를 보급하였으며, 1891년에는 우리나라 두번째 영한사전과 신앙관계서적을 발간하였다. 제2대 주교인 단(端) 주교는 《종고성교회월보(宗古聖敎會月報)》(종고성교회는 대한성공회의 옛 명칭)를 창간하고 전국에 진명학교(進明學敎)를 세웠다.
제3대 주교 조(趙)마가는 1911년 교구장(敎區長)이 되어 대한성공회의 체제를 갖추고, 서울 정동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을 건립하는 한편 선교정책을 확립하였다. 1914년 4월 30일 성직자양성기관인 성미가엘신학원을 세웠으며, 191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로 김희준(金熙俊)이 서품을 받았다. 1931년에 서품된 제4대 주교 구(具)세실은 북한지역선교에 주력하여 평양·해주·진남포·연백 지역으로 교세를 확장하였다. 1931년에는 일제의 억압정책으로 부설학교가 문을 닫았고 1936년부터는 성직자가 연행되거나 감시를 받았다.
6·25전쟁중에는 한국인 성직자 3명, 영국인 성직자 2명, 수녀 1명이 처형되고, 주교 구세실은 모스크바까지 납치되었다가 1953년 포로교환 때 풀려났다. 1955년 서품을 받은 제5대 주교 김요한(Daly,J.)은 다른 교파와의 대화, 사회참여 및 산업선교활동에 주력하고 강원도 황지(黃池) 탄광촌에 한국 최초로 산업학교를 세웠다.
1965년 이천환(李天煥)이 첫 한국인 주교가 되었으며, 교구가 서울교구와 대전교구로 나뉘었다. 1974년 대전교구는 다시 대전교구와 부산교구로 나뉘었고, 이 중 대전교구는 1993년 4월 자치관구로 독립하였다. 신·구교의 중간 입장에서 교회일치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 교회의 사회참여를 주도하고 있다. 부설기관으로 성직자 양성기관인 천신신학교(天神神學校)와 성가수녀회(聖架修女會), 성공회출판부 등이 있으며, 2001년 현재 교회수 117개, 신부수 212명, 신도수 6만 3973명이다. 본부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번지에 있다.
2)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약칭 '기하성', http://www.kihasung.or.kr) : 프로테스탄트 오순절계(五旬節系)의 한 교파
▲ 기하성 로고
보통 순복음교회(純福音敎會)라고도 한다.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 삼위일체(三位一體)인 하나님을 믿으며, 중생(重生)·성령충만·신유(神癒)·재림(再臨) 등을 주요교리로 삼고 있다. 1928년 개인 자격으로 M.C.럼시가 오순절적 신앙선교를 목적으로 내한하여 당시 구세군에 근무하던 청년 허홍(許弘)과 함께 정동(貞洞)에 선교본부를 둔 것이 이 교회의 효시가 된다.
그 후 1932년 일본에서 돌아온 박성산(朴聖山) ·배부근(裵富根)이 서빙고에 오순절교회를 설립하고 교세를 확장하던 중, 1945년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강제출국을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광복과 더불어 일본에서 오순절계 신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곽봉조 ·윤성덕 ·김성환(金城煥) 목사 등이 각기 고향에 교회를 세웠으나 6 ·25전쟁이 일어나 또다시 시련기를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오순절 운동이 직접적으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교회와 연결된 것은 미국 '하나님 성회' 소속 선교사 A.B.체스넛이 내한하여 박성순 목사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신앙동지를 규합, 1953년 서울에서 교단을 창립하고 명칭을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라고 한 때부터이다. 같은 해, 교역자 양성을 위한 순복음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세확장에 힘쓰다가 1957년 신학교 맹휴사건으로 교단이 분열되었다.
그 후 1959년 미국의 아시아 선교부장 케참 목사가 내한하여 2만 달러를 투자, 신학교를 신축하고 서대문에 중앙회관을 설립하는 등 전국복음화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순복음(Full Gospel)' 운동의 주동이 되어 교회 명칭에도 순복음이 들어가게 되었고, 1972년에는 분열되었던 교단이 다시 합쳐 선교부와 협력관계를 맺고 조직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2001년 현재 교회수 1,417개, 목사수 3,534명, 교인수 110만 6712명이며, 교육기관으로 한세대학교, 신학교 3개 교가 있다. 이 밖에 5개의 농아교회, 경기도 파주시의 오산리 기도원과 2곳의 수양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본부 소재지는 한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222번지이다.
3)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약칭 '예장통합') :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 예장통합 로고
장로교의 대표적 중도교단으로 예장통합측이라고도 한다. 성서를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으로 믿고, 이를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으로 삼으며, 칼뱅주의에 입각한 장로회헌법과 12신조 및 대소교리문답의 교리를 기본신조로 한다. 1884년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앨런(H.Allen)이 고종의 지시에 따라 광혜원을 운영하고,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소속 로스(J.Ross)가 신약성서를 번역하여《예수셩교젼서》를 출간하면서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1893년 선교사들이 장로회선교공의회를 조직하였고 이것은 1901년 한국교회 대표들이 함께 참여하는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로 발전하였다. 1907년 9월 17일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가 조직되어 독로회(獨老會)라 불리었으며, 같은 해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이 최초의 한국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1912년 9월 1일 독로회시대를 청산하고 7개 노회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였으며, 1922년에는 헌법을 제정하여 장로교의 신앙노선과 교리체계를 확립하였다.
1938년 9월 10일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으나, 이에 반대하는 50여 명의 목 사들이 순교하고 평양신학교는 폐쇄당하였다. 1943년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된 뒤 1945년 7월 18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통합되었다. 광복후 1947년 총회를 재건하고 1949년 4월 22일 교단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바꾸었다. 1952년 9월 11일 고려신학교측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를 조직하여 분리해나가고, 1953년 6월 10일 조선신학교측이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조직하여 분리해나갔다. 1959년 9월 28일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이 분리해나갔으며, 그 이후 50개가 넘는 교단이 생겼다.
주요 활동은 ① 선교, ② 총회산하 각 교회의 신앙교육 장려, 총회산하 각 기독교학교의 신앙교육 장려, 교육부 산하 각 연합회 지도 관리, ③ 노회 및 지교회의 사회선교·사회봉사 활동을 위한 지원활동, ④ 사회선교를 위한 인력 발굴, ⑤ 효과적인 구호를 위한 정책개발과 집행, ⑥ 소외된 농어촌교역자 재교육, ⑦ 각노회 농어촌부 활성화, ⑧ 농어촌살리기 운동, ⑨ 군종목사 지원, ⑩ 선교사 파송 및 관리업무 등이다. 기관지로는《기독공보》를 발행한다.
최고의결기관인 총회의 임원은 총회장·부총회장·서기·부서기·회계·부회계·회록서기·부회록서기로 구성되며, 총무단은 총무·사무국장·기획국장·7개부로 구성된다. 산하기구로는 10개 상임부, 10개 위원회, 24개 특별위원회, 4개 재단, 2개 기관, 7개 신학대학교, 19개 자치단체, 18개 국내연합선교기관, 해외선교협력교단, 해외교회연합기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이 있다. 그밖에 노회 60개, 교회 6,494개, 목사 1만 3409명, 전도사 4,036명, 장로 1만 6138명이 있다. 본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135번지에 있다.
4) 한국기독교장로회 (약칭 '기장', http://www.prok.org) :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분립, 김재준(金在俊)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1953년에 형성된 교단.
원 : 성령 안에서 성도의 교제(일치)와 온 세계(오이쿠메네), 에큐메니칼(연합) 정신을 상징합니다. 기 : 한국기독교장로회 기장의 약자를 상징합니다. 화살(촉)로서 희망의 전진과 출애굽, 본 교단의 전진성(진보성)과 새 질서를 향한 탈출과 해방을 상징합니다. 파란색 : 자유, 희망, 젊음을 상징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약칭 예장)와 그 뿌리는 같다. 그러나 1947년 제33회 총회 이후 김재준 등이 주축이 되어 세운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의 전신) 문제를 둘러싸고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분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어 1952년 4월 제37회 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에서 명칭을 바꾼 한국신학대학 졸업생에 대한 목회자격을 박탈하고, 김재준 목사의 교수직 파면과 아울러 소속 경기노회에서 목사직 박탈이 의결되면서 이듬해 6월 완전히 분리되었다.
조선신학교는 17세기 정통주의 신학과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중간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 신정통주의 입장을 취했으나, 성서의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을 신봉하는 박형룡(朴亨龍) 목사를 주축으로 한 보수진영에서 '성서 무오류'를 주장하면서 기독교장로교측을 극단적 자유주의로 혹평함으로써 완전 결별로 치닫게 된 것이다.
1956년 제41회 총회에서는 한국교회사상 최초로 부목사·여자장로제 등을 채택하고, 이듬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가입해 국내교회 연합사업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1960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도 가입하였다. 1961년 18개 노회를 9개 노회로 통합하고, 교단명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개칭하면서 새로운 도약기를 맞았다.
전국에 24개의 노회가 있고, 총회 기관으로는 한신대학교와 영생고등학교를 비롯해 14개의 장애인 선교기관, 8개의 사회복지법인, 6개의 특수 선교기관이 있다. 총회본부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인수동 산76에 있다.
5) 기독교대한감리회 (약칭 '기감', http://www.kmc.or.kr/index.html) : 한국 프로테스탄트계의 교단.
▲ 기감 로고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는 곧 한국 프로테스탄트계 교회의 시작이다. 한국 프로테스탄트계 교회의 시작은 한국의 본격적 개화운동과 근대적 민족운동의 시작과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감리교회는 1884년 6월 23일 R.매클레이 박사를 통하여 한국에 처음 들어왔다. 그 무렵 그는 일본에서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업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고종(高宗)의 허락을 얻어 한국에서 감리교회 주관하에 교육과 의료사업을 개시하기로 하고, 그 실행을 미국 선교본부에 청원하였다.
한국에 선교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맨 처음부터 주장한 볼티모어시(市) J.F.가우처 박사의 원조와 장려로 1885년 미국 감리회의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그들이 북감리회 소속 선교사들인 H.G.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W.B.스크랜턴 의사 부부였으며, 스크랜턴의 어머니 M.F.스크랜턴 부인도 미국 감리회 여선교회 대표로 건너왔다. 아펜젤러 부부는 일본을 거쳐 그 해 4월 5일 장로회 선교사 H.G.언더우드 박사와 함께 인천에 상륙하였고, 스크랜턴 가족은 5월에 입국하였다.
그 해 6월에는 아펜젤러가 학생 6명을 데리고 배재학당(培材學堂)을 개교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처음으로 서울 정동(貞洞)에 있는 자신의 사택에서 한국인과 처음으로 예배를 가짐으로써 정동교회가 시작되었다. 스크랜턴은 정동에 병원을 열고, 그의 부인은 단 1명의 여학생으로써 1886년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을 개설하였다. 1887년 1월 정동교회에 처음 한국에서 주일학교(主日學校)를 열었고, 12월에는 북감리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남감리회도 독자적으로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였다.
중국 유학 중 교인이 된 윤치호(尹致昊)가 1885년 귀국하여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남감리회 선교본부에 청원하였다. 이에 따라 E.R.헨드릭스 감독과 중국에서 선교하던 C.F.리드 박사를 따라 그 해 10월 한국에 와서 선교사업 개시를 결정하고 교회 부지를 샀다. 이듬해에는 리드가 가족을 데리고 남감리교회의 첫 선교사로 상하이[上海]에서 서울로 건너와 전도 및 교육사업에 착수하였다.
당시 주한 미국공사는 선교사 출신인 H.N.앨런(한국명 安連)이었다. 그의 주선으로 리드는 고종을 알현하고, 국왕으로부터 "한국에 좋은 교사를 파송하여 한국민의 문화발달에 공헌하여 달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리하여 지금의 한국은행 자리에 선교본부를 마련하고, 중국 선교구역의 한 지역으로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 다음해 5월에 분리하여 따로 한국선교부를 설립하고 리드가 초대 감리사(監理師)가 되었다.
6)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약칭 '복음교단', http://www.kec21.org) : 1935년 창립된 한국 프로테스탄트교회의 교단.
본래 교파로서 출발하였다기보다는 1920∼1930년대의 기성교회를 비판하고 반성하는 입장에서 한국인 자신의 주체적인 신앙결단으로 출발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돌아온 최태용(崔泰瑢)이 1925년부터 《천래지성(天來之聲)》을, 1929년부터는 《영(靈)과 진리(眞理)》라는 신앙잡지를 발간하면서 각지에서 전국의 독자를 중심으로 종교집회·강연을 벌이자, 곧 기성교회의 비판과 이단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1935년 12월 22일 무교회주의자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기독교 조선복음교회' 창립 총회를 가졌는데, 주로 호남지방인 이리·군산·서산·김제·임실·금마 등지의 독자들, 서울과 강원도(북한) 금강산 일대 및 함경도 명천 등지에서 모인 교인들이 주체를 이루었다. 이 총회에서 최태용이 초대 감독(1935∼1936)이 되었는데, 출범 당시 전국의 교회수는 8개였다.
2대 감독은 백남용(白南鏞:1936∼1950)이 맡았고, 1961년부터 이사회 제도로 개편되었다. 이후 지동식(池東植:1961∼1970)·장성환(張聖煥:1970∼1977)이 이사장을 맡았고, 1977년부터 다시 총회장 제도로 바뀌어 조용술(趙容述)·허정·오충일 등이 총회장을 이었다. 2002년 현재는 윤기열이 총회장을 맡고 있다.
교리는 ①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야 하며, ②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야 하며, ③ 교회는 한국인 자신의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1999년 12월 현재 전국에 60개 교회가 있으며, 교인수는 2만 7000여 명이다. 신학교로 1개교가 있고, 사회사업기관으로 장애인복지시설 등이 있다.
7) 한국정교회 (http://www.orthodox.or.kr/html)
▲ 한국정교회 로고
“하나이며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정교회는 1900년에 한국에 전파되었다. 그해 1월에 러시아인 흐리산토스 세헷콥스키 수사 신부가 직장 때문에 한국에 와 있는 러시아 정교회 교인들과 러시아에서 근무하던 중 정교회 교인이 된 한국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서울에 도착했다. 1903년 흐리산토스 신부는 서울에 성당을 마련하여 이를 성 니콜라스 성당이라 명명하고 그곳에서 의욕적인 선교 사업을 시작했다.
정교회의 복음에 대한 권위 있는 가르침과 그 예배의 풍부함과 장엄함, 그리고 신비로운 분위기는 많은 한국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온 정교회는 그 첫 출발부터 끊임없는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흐리산토스 신부가 한국에 온 후에 발발한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전쟁에서 1904년 러시아가 패하자 일본은 한국에 있던 러시아 인들에게 강제 출국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흐리산토스 신부와 그의 러시아인 협력자들은 러시아로 돌아가야만 했으며 갓 형성된 한국 정교회의 작은 양떼는 목자를 잃은 고아가 되고 말았다.
러시아의 두 번째 선교사업은 빠벨 이바노프스키 수사 신부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1906년부터 1912년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의 정교회에 새순이 돋아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의 정교회 신자들은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했으며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1917년 혁명이 일어나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하게 된 러시아 교회는 더 이상 지원을 해 줄 수 없게 되었다고 한국의 정교회에 통보했다.
이제 한국의 정교회는 러시아로부터 지원도 끊기고 다른 지역의 정교회와의 대화 수단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처절한 투쟁을 시작해야만 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한국의 유일한 사제였던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가 북한에 납치된다. 또한 전쟁 중에 떨어진 포탄에 의해 서울 성당이 크게 파손되었다. 얼마 안 되던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져 피난을 가버리고 겨우 타오르기 시작한 한국 정교회의 작은 불꽃이 사그라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기적이 일어났다. 하느님께서는 한국 정교회 교인들의 희생과 흔들림 없는 믿음에 상을 내리시며 전쟁의 폐허 가운데에서 한국 정교회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 한국 전쟁에 참여한 그리스군의 종군 사제였던 안드레아스 할끼오뿔로스 수사 신부의 따뜻하고 지칠 줄 모르는 보살핌 덕분에 한국 신도들은 서울에 다시 모였고, 전쟁고아들은 보호를 받았으며 성당이 재건 되었고 수백 명이 세례를 받았다.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안드레아스 신부는 한국 신도들 중에서 천거된 보리스 문이춘 신부를 1954년 1월 일본 도쿄의 주교부에서 사제 서품을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한국에서의 정교회 부흥은 정말로 멀고도 험난한 길이었다. 보리스 문이춘 신부와 그의 협력자들의 초인적인 노력으로 한국 정교회의 “작은 양떼”는 유지되었으며, 한국 정부가 국가 재산으로 편입시키려 했던 교회의 재산도 지켜졌으며, 1968년에는 현재의 위치에 역시 니콜라스 성인에게 바쳐진 비잔틴 양식의 웅장한 성당이 건립되었다.
이후 한국의 정교회는 세계 총대주교청의 산하 기관인 뉴질랜드 대교구에 속해서, 1975년부터 수사 대신부로 한국에서 대주교 대래 직분을 맡아오다가 1993년 보좌 주교로 승품된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주교의 보필을 받는 뉴질랜드의 디오니시오스 대주교의 사목을 받고 있다가, 2004년 4월 20일에 세계 총 대주교청이 한국에 대교구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여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주교를 초대 대교구장으로 선출하자 같은 해 6월 20일에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의 착좌식을 거행하였다.
8) 구세군대한본영 (http://www.salvationarmy.or.kr) : 1908년 영국 구세군 사관 로버트 호가드(Robert Hoggard) 정령(正領)이 창설한 구세군 한국본부.
1907년 구세군 창설자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의 일본 집회 때, 여기에 참가한 한국인 유학생들의 요청으로 1908년 서울 정동에 한국 구세군의 첫번째 영문(營門:구세군교회)이 문을 열었다. 초대 한국 사령관인 영국인 로버트 호가드(Robert Hoggard: 한국명 허가두) 정령(正領)은 8년간의 재임기간 동안 사관 87명, 교인 2,753명, 영문 78개소를 개척하는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었다.
1910년 구세군사관학교의 모체인 성경대학을 개설하여 사관을 배출하기 시작했으며, 1925년에는 영문 170개소, 사관 218명, 평신도 9,000명으로 그 교세가 늘어났다. 1909년 《구세신문》을 발행하고, 1920년에는 사관지를 발행하는 등 활발한 출판활동을 벌였으며, 1916년 29명의 걸인 아동을 돌보는 ‘남자실업관’(서울후생학원)을 시작으로 사회사업에 뛰어들었다.
연이어 빈민 숙박사업, 여자육아원(혜천원), 여자부양소(서울여자관) 등을 신설하고, 각종 재해구제 및 태풍수해 구제, 지붕개량사업, 급식사업, 의료선교사업 등을 벌였으며, 이를 위해 1928년 자선냄비를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한동안 교세가 약해지는 듯하였으나, 광복 후 활발한 활동으로 다시 교세를 확장하였으며,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본영을 옮기고 피난민을 위한 급식사업, 구호사업 등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때 많은 사관들이 순교, 또는 피살되거나 납북당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하였다.
1960년대 현재의 신문로(新門路) 구세군회관을 신축하고, 1970년대 한국인 사령관 전용섭(全龍涉)이 취임하면서 한국 상황에 맞는 선교정책과 개척운동 및 자급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1985년 과천으로 구세군사관학교를 이전하고, 1987년 사관연장교육으로 ‘성교신학원’을 창설하였다. 1989년 전국 구세군 정교연합회를 발족하고, 1996년 평신도 지도자 육성을 위한 ‘권역별 수련원’을 개설하였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58-1번지에 있다.
[ 한국기독교총연합회 (CCK, http://www.cck.or.kr) ] : 66개 교단 연합체
1.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 설립목적
2. 주요사업
① 한국기독교의 연합사업 ② 이상의 과정 수행을 위한 홍보출판 및 전문인력 양성 ③ 사이비 및 이단 집단에 대한 대책 ④ 사회와 정부 및 국제적 공동 관심사에 대한 협력사업 ⑤ 남북평화통일과 대북한 관계대책 ⑥ 한국의 복음화와 세계복음화 사업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신구약 성경을 정경으로 믿으며 복음주의적 신앙고백을 같이하는 한국의 기독교 교단과 단체의 연합기관으로서, 각 교단과 단체가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교회의 사명 감당을 위해 연합하며 정책과 사업을 개발 시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989년 교계 원로목사 10여명의 제창으로 각 교단 증경총회장 및 기관단체 대표들이 함께 회동, 기도회를 갖고 창설되었다. 2009년 제 20차 총회를 거치면서 66개 교단과 21개 기관 . 단체가 가입한 명실공히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연합기관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교단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연합과 협력을 통하여 우리 민족과 전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목사복'을 제정하여 보급하였고, 사회봉사의 모본을 제시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제창하여 시행하고 있으며, 기독교교도소 설립을 운영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고 '재단법인 아가페'를 태동시켰다.
남북의 평화통일과 북한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으며 '통일선교대학'을 설립 운영하여 지도자를 양성하고 있다. 탈북자 보호와 난민지위 획득을 위해 UN청원 활동을 벌였고 국내 정착 지원에도 힘을 쏟고 있다. 이단 사이비 문제와 단군상 문제 등 진리 수호에 앞장 서 왔고, '21세기크리스찬연구원' '한국교회청소년지도자대학' '문화예술체육선교대상' 등 통해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 선교와 경건한 기독교 문화 창달과 정착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회와 정부 및 국제 사회를 향하여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정책의 수립과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본 연합회는 한국교회의 숙원인 '하나의 통일된 연합기관' 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연합과 일치에 선도적 자리에서 그 책임을 다할 것이다.
3.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심블
4.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약도
5.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가맹교단 (66개 교단)
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약칭 '예장', http://www.gapck.org/index.asp)
(통합, 합동, 고려, 고신, 개혁A, 개혁B, 합동보수A, 합동보수 망원측, 대신, 호헌A, 호헌B, 합신, 국제합동, 합동복음, 보수개혁, 국제, 고려, 개혁합동, 성합측, 합동중앙, 성장, 중앙, 총회측, 합동복구, 보수, 근본, 연합, 합동정통, 개혁선교, 합동진리, 개혁총연, 합동개신, 진리, 보수합동, 합동보수B, 예장, 합동연합, 선교, 브니엘, 웨신, 한영, 합동동신, 합동개혁, 개혁, 합동총신측, 피어선, 고려개혁, 합동한신, 개혁진리, 합동보수C, 합동선목, 합동개혁B)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로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1901년 시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를 모체로 1912년 창립되었다. 본 교단은 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파 신학(Reformed Theology)을 근본 신앙으로 하여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 문답을 교리적 표준으로 삼고, 장로교 헌법의 정치원리를 가지며 교회의 전통과 권위 및 질서를 지켜오고 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 위키백과 자료임..^^
1901년에 발족한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가 뿌리이다. 한국에서는 미국에서 파견된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19세기 후반부터 장로교 선교를 시작했고, 1893년 장로회선교공의회를 조직하여 장로교단의 모체로 삼았다. 1901년에 이 장로회선교공의회에 한국인이 참여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로 발전시켰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7명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가 배출한 1907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가 조직되어 독로회로 불렸다. 독로회 체제는 5년 동안 지속되다가 1912년부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로 발전했다. 제1,2,3회 총회장은 외국인 선교사가 맡았으며, 1915년 김필수가 제4회 총회장에 선임되어 한국인이 총회장을 맡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제27차 총회(1938년)가 공적으로 신사참배(우상숭배)를 가결하고 시행함으로써 1943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일본 장로교 산하로 통합되었고, 1945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라는 통합 기독교 교단에 흡수되었다. 일제 패망 후 재건되어 1947년 총회가 복구되고 1949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로 개칭했다.
1952년 고려신학교 가 대한예수교장로회와 합동하여 다시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으로 환원되었고, 1957년에는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는 진보적 장로교 계열이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를 조직하여 분열해 나갔다. 1959년세계교회협의회 가입을 둘러싼 의견 대립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으로 갈라졌다.
이후 1961년 박병훈 목사를 주축으로 한 대한예수교장로회(호헌)가 분리해 나간 뒤로 대한민국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교단은 170여 개에 이르는데, 이러한 장로교회의 분열상에 대해 복음주의 신학자 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는 그 자신이 장로교 성직자임에도 한국장로교의 분열은 자기에게 집중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과 독선에 따른 일이며, 이제라도 한국장로교회는 교제와 협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혁주의 역사신학자인 최덕성 교수는 한국장로교회는 반드시 장로교가 근간으로 하는 성경'진리'와 개혁주의 교리안에서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2)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 (약칭 '기성', http://www.kehc.org) : 한국 프로테스탄트계의 교단.
▲ 기성 로고
4중복음(四重福音), 즉 중생(重生)·성결(聖潔)·신유(神癒)·재림(再臨)을 주요 명제(命題)로 삼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영혼 구제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일본 도쿄[東京]에 있던 동양선교회(東洋宣敎會) 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金相濬)·정빈(鄭彬) 두 사람이 1907년(융희 1) 동양선교회 선교사 C.E.카우만 부부와 E.A.킬보른의 도움으로 서울 종로 염곡(鹽谷:현재의 武橋洞)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福音傳道館)'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1911년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을 설립하고, 1921년에는 '기독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이듬해부터 기관지 《활천(活泉)》을 발간하였다. 그 후 유지재단(維持財團) 설립, 총회 조직 등 교세확장에 힘써 오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구세군과 더불어 다른 교단보다도 심하게 탄압받아 강제해산되었으며, 많은 교역자와 신도가 순교하거나 추방당하고 또는 옥고를 치렀다.
8·15광복 후에 재건되어 1949년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으나 다시 6·25전쟁으로 많은 성직자가 납북되는 등 남다른 수난을 겪었다. 1951년 미국에 본부를 둔 동양선교회 주한선교부(駐韓宣敎部)가 활동을 개시하였고, 1957년에는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관을 설립하는 등 많은 기념사업을 펼쳤다. 1961년 연합기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의 탈퇴문제로 일시 교단이 분열되었으나 1965년에 다시 합동을 이룩하고 교세확장에 힘썼다.
2001년 현재 교회 3,101개, 목사수 5,010명, 교인수 62만 3,813명이다. 교육기관으로 서울신학대학교가 있으며, 기타 사회사업기관이 있다. 한편, 인도·타이 등 해외선교활동도 활발하다. 기구편성은 총회·총회장 밑에 각 위원회와 학교법인·유지재단 등 많은 부서가 있고, 교단 산하에 해외·국내·특수전도·농어촌부를 비롯한 각종 부처가 있다. 본부 소재지는 한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 890-56번지이다.
3)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총회 (약칭 '예성', http://www.sungkyul.org/sungkyul) : 성결교회 중 보수적 경향을 띠는 분파.
▲ 예성 로고
동양 선교차 일본에 파송되어온 미국 감리교 선교사 C.E.카우만(C.E.Cowman)과 E.A.킬보른(E.A.Kilbourne)의 후원으로, 도쿄[東京] 성서신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김상준(金相濬)·정빈(鄭彬) 등에 의하여 1907년 당시 경성부 종로 염곡(현재 서울 무교동)에 세워진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에서 비롯되었다.
1961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 때 국제복음주의협회(NAE)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등의 단체에서 탈퇴한 인사들이 같은해 5월 30일 서대문구 소재 독립문교회당에서 보수 총회를 결성하였다. 1962년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교파의 명칭을 정하고, 독립적인 신학교 운영을 결의하였는데 그 학교가 현재 경기도 안양시에 소재하는 성결대학교로 발전하였다. 1972년 내부적인 신학노선상의 갈등으로 예수교대한성결교회 혁신측이 분리를 선언하였고, 1973년 6월 혁신 총회를 구성하여 예수교대한성결교회와 혁신 총회로 분열되었다.
1976년 3월에는 전영식을 초대 원장으로 한 한국보수신학원(현재 성결교신학대학원)을 설립하였다. 1988년 12월 제67회 총회 때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총회(총회장:강용조)와 혁신 총회(총회장:손택구)가 분열 15년 만에 조건 없이 재결합을 하였다. 1995년 10월에는 서울 잠실올림픽 주경기장에서 57개국의 10만여 명이 참가한 ‘95 AWF 대회 및 성결인의 세계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교단은 성결교회 4중 교리인 중생(重生)·성결(聖潔)·신유(神癒)·재림(再臨)을 성서해석에서 4중복음으로 강조한다. 그밖에 CMA 한국선교부 사무실과 장로회 전국 연합회 사무실이 같은 건물에 있다. 산하기관으로는 군종목사단, 남전도회 전국연합회,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청년회 전국연합회, 주일학교 전국연합회 및 협력기관 등이 있다. 서울, 인천, 경기를 중심으로 전국에 30개의 전국지방회가 있다. 2001년 현재 교회수 947개, 목사수 1,719명, 신도수 50만 5946명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30번지에 있다.
▲ 나성 로고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Korea National District Church of the Nazarene)는 1948년 10월 25일에 정남수 목사가 한국에서의 선교를 협의하고, 미국 나사렛교회 감독인 니스와 함께 내한하여 공식 창립된 기독교계열 개신교교단이다. 1954년에는 개신교 선교사였던 오은수(Dr. Donald Owens)가 내한하여, 지금의 나사렛대학교를 설립하였다.
5)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약칭 '기하성') : 프로테스탄트 오순절계(五旬節系)의 한 교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 : 총회장 박성배 목사, http://www.kihasung.org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통합) 총회 : 대표총회장 조용목 목사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여의도순복음) 총회 : 총회장 이영훈 목사, http://www.agk.or.kr/default.asp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순복음) : 총회장 김교신 목사, http://www.korea-ag.com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약칭 '기하성')은 보통 순복음교회(純福音敎會)라고도 한다.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 삼위일체(三位一體)인 하나님을 믿으며, 중생(重生)·성령충만·신유(神癒)·재림(再臨) 등을 주요교리로 삼고 있다. 1928년 개인 자격으로 M.C.럼시가 오순절적 신앙선교를 목적으로 내한하여 당시 구세군에 근무하던 청년 허홍(許弘)과 함께 정동(貞洞)에 선교본부를 둔 것이 이 교회의 효시가 된다.
그 후 1959년 미국의 아시아 선교부장 케참 목사가 내한하여 2만 달러를 투자, 신학교를 신축하고 서대문에 중앙회관을 설립하는 등 전국복음화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순복음(Full Gospel)' 운동의 주동이 되어 교회 명칭에도 순복음이 들어가게 되었고, 1972년에는 분열되었던 교단이 다시 합쳐 선교부와 협력관계를 맺고 조직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1981년 조용기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와 조용기 목사에 대한 서대문측 교단의 징계문제로 1차 분열이 있었고, 이때 생긴 교단이 조용기 목사을 주축으로하는 순복음측(반포측-삼성측-사당동측)이다. 다시 조용기 목사께서 여의도교회는 순복음측에서 탈퇴하여 단독교회로 있겠다고 선언한 뒤 단독으로 계시다가 1985년 1월 1일 예수교대한하나님의성회(약칭 '예하성')을 만들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하나님의성회는 크게 서대문, 순복음, 예하성으로 나뉘게 되었다.
다시 조용기 목사가 예하성에서 나오셔서 함께 나온 일부 교회와 서대문측 일부와 사당동측일부가 합하여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통합측)를 만들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통합찬성파(통합)와 반대파(수호)로 분열되었고 몇 년 후에는 비대위측이 생겨나서 결국 세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2006년 말경 세 교단 대통합이 추진되어서 결실을 맺어 2007년 10월 15일 기하성 통합측과 수호측, 예수교대한하나님의성회(예하성)가 일시적으로 통합되었다.
2008년 5월 20일 900여 명의 총대원 중에 100여 명의 이탈자들이 이천순복음교회 주차장에 모여 통합을 반대하고 총회장을 선출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면서 교단통합이 무산된다. 2010년 현재 기하성은 기하성 서대문측(총회장 박성배 목사, 1587개 회원교회)과 기하성 통합측(대표총회장 조용목 목사, 1910개 회원교회), 기하성 여의도순복음측(총회장 이영훈 목사, 575개 회원교회)의 3개 교단 구도로 짜여 있다.
그중 기하성 서대문측(박성배 목사 측)과 기하성 양평동측(=통합측, 조용목 목사)은 수십 건의 크고 작은 법적 다툼을 벌이고 있다. 기하성 여의도순복음은 한 발짝 물러서 관망하는 모양새이다.
6) 예수교대한하나님의성회(약칭 '예하성') : 프로테스탄트 오순절계(五旬節系)의 한 교파.
한국의 오순절교회 운동은 193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의 한국 하나님의 성회 각 교단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성회의 선교는 1947년 A. B. 체스넛 선교사가 입국하고, 1952년 동양선교부장 오스굿 목사가 내한하여 선교부를 조직하면서 이루어졌고, 1953년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파를 창설했다.
예수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태동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1981년에 기하성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1985년 1월 1일 예수교대한하나님의성회를 설립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981년 12월 7일, 교단이 분열되면서 신반포 측이 교단을 반분(半分)하여 운영하다가 갑자기 좌절을 만난다. 매월 1억원씩 여의도순복음교회로부터 지원받던 보조금이 끊기고 이어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신반포 측 교단과의 관계를 청산(淸算)하였다. 그리고는 바로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설립하여 소위 "헤쳐 모여"하게 되었다.
좌절과 혼란에 빠진 신반포 측 교단은 3년 만에 와해되고 소속 교회들은 제각기 갈길 찾아 나섰는데 대체로 세 부류로 나뉘게 된다. 첫째로 서대문 총회로 복귀한 교회들, 둘째로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로 들어간 교회들, 셋째로 신창균, 제양성 목사가 주축이 되어 남현동에다가 본부를 둔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삼성 측)에 들어간 교회들,
그후 1992년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와 통합을 주장하는 세력과 통합을 거부하는 세력이 맞서 다시 교파가 나뉘어 지금은 조용목 목사의 남부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교파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예하성과 기하성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통합을 반대한 세력이 예하성으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통합 전의 예하성 교회는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중심이었으나 통합 후의 예하성 교회는 조용목 목사의 안양 은혜와진리교회가 중심이 되었다.
2007년 10월 15일 기하성 통합측과 수호측, 예수교대한하나님의성회(예하성)가 일시적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2008년 다시 분열되었고 기하성 통합측(대표총회장 조용목 목사), 기하성 여의도순복음측(총회장 이영훈 목사), 기하성 서대문측(총회장 박성배 목사)의 3개 교단 구도로 짜여 있다. 그중 기하성 서대문측과 기하성 통합측(양평동측)은 수십 건의 크고 작은 법적 다툼을 벌이고 있다.
7) 기독교한국성결회(구 '기독교한국하나님의교회') : 프로테스탄트 오순절계(五旬節系)의 한 교파.
기독교한국성결회는 세계하나님의교회에 속한 교단으로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문래동의 한 가정에서 한영철 목사 외 2명에 의하여 최초의 한국하나님의교회가 개척되었다. 1964년 세계하나님의교회 제50차 총회에서 한국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한국에의교단 명칭을 "기독교한국오순절하나님의교회"로 하였다.
하나님의교회신학교는 오늘날 한영신학대학교로 기독교한국하나님의교회 제1대 교단감독 한영철목사가 기도와 노력으로 세계하나님의교회로부터 전체를 지원 받아 건립한 교단직영학대학이다. 2003년 3월 5일자로 세계하나님의교회 총감독은 기독교한국하나님의교회 제2대 감독으로 고병수목사를 임명하였다.
2003년 12월 현재 기독교한국하나님의교회는 서울, 중부, 남부 3개 지방으로 지방감독이 있고, 교단 산하에 전도국. 여성선교국. 청소년 및 교육국. 평신도위원회 등의 기관이 있으며 매년 전도총회와 매 2년마다 사무총회를 개최하고 사무총회에서 교단감독 선임과 실행위원 선출을 총회원의 투표로 하고 있다.
8) 대한예수교복음교회 총회 (http://www.koreafg.net) : 프로테스탄트 오순절계(五旬節系)의 한 교파.
대한예수교복음교회는 기독교 오순절신앙운동에 입각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개신교단으로, 국제복음교회(ICFG :International Church of the Foursquare Gospel)의 한국교회이기도 하다.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으로 믿고, 이를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으며, 성경에 입각한 4대교리(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왕,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의사)를 기본신조로 한다.
국제복음교회(International Church of The Foursquare Gospel)는 1923년에 세계적 신유 부흥사인 에이미 샘플 맥퍼슨(Aimee Semple McPherson)목사에 의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되었다. 대한예수교복음교회는 1969년 학교법인 대성학원 이사장인 김신옥 목사의 요청에 의해 국제복음교회에서 파송한 탐슨 선교사 부부(Arthur & Evelyn Thompson)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1970년 2월 1일에 문화공보부로부터 종교법인으로 인가받아(문공부허가 제237호, 종무1-75) 출발하였다.
대한예수교복음교회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오순절교회협의회(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기독교한국성결회, 기독교한국 성서하나님의교회 등)의 회원 교단으로 연합사업에 참여하고 있으며 또한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를 통해 21세기가 요구하는 영적 지도자를 훈련하여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에 앞장서고 있다.
9) 기독교한국침례회(약칭 '기침', http://www.koreabaptist.net) : 프로테스탄트계(系)의 교단
▲ 기침 로고
교리는 신약성서적 교회를 표방하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신앙과 행습의 표준으로 신구약성서를 유일한 경전으로 삼는다. 교회의식은 침례와 주의 만찬이며 의식은 상징적일 뿐 구원에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내세운다.1889년 캐나다의 독립선교사 M.펜윅이 토론토대학교 기독청년회의 후원으로 극동선교에 뜻을 품고 내한하여 포교를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펜윅은 서울·황해도 솔내[松川] ·함경도 원산(元山) 등지를 전전하며 한국어를 공부하다가, 1893년 일단 귀국하여 침례교로 전향한 후 1896년 다시 내한하였다. 원산에 본부를 두고 선교에 힘쓰던 중 1901년 재정난으로 한국에서 철수하는 엘라딩 기념 선교회의 충남 공주 ·강경 지역의 선교기반을 인수하여 자신의 한국 순회선교회와 병합하고 조직을 강화하였다.
1905년 공주에 성서학원을 설립, 목회자 양성에 힘쓰는 한편, 신명균에게 안수하여 원장에 임명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침례교 첫 목사의 탄생이었다. 1906년 강경에서 첫 회의를 열어 명칭을 '대한기독교회'라 하고, 초대 감독에 펜윅을 추대하였다. 원산에 본부를 두고 한국 전역에 걸쳐 선교사업을 벌이는 한편,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교세를 넓혔다. 1921년 일제의 강요로 명칭을 '동아(東亞)기독교회'로 개칭하였고, 1936년 펜윅이 사망한 후로는 일제의 교회탄압이 심하여 많은 순교자를 냈다.
광복 후인 1949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되었으며 1950년 제40회 총회때 미국 남침례교 선교사 아버나티 부부가 내한하여 이들과 손잡으면서 선교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59년에는 그 동안 분열 상태이던 대한기독교침례회와 기독교대한침례회가 다시 통합하였고, 1969년 재단법인이 설립된 후, 1976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개칭되었다. 1951년 부산 침례병원 개설, 1954년 대전침례신학대학 설립(현 침례신학대학교), 1955년 《침례회보》 발행, 1979년 수도침례신학교를 설립하는 등 점차적으로 교세를 확장해갔다.
10)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연합) (약칭 '기감연합', http://kmcy.hompee.com)
1988년 8월 30일 14시 30분에 서울시 마포구 아현2동 343-1에 소재한 산성교회당에서 16개 교회 담임교역자의 출석과 위임 4개 교회의 담임교역자와 장로 1명이 참석하여 구수회의를 하고, 교단 창립위원회를 두어 교단창립 결의하고 김동섭목사가 준비위원장 이준영목사를 추천하니 박수로 환영하다. (준비위원:이준영목사, 김낙성목사, 신교선목사, 신민주목사, 김동섭목사, 박상덕목사, 신성식목사, 어승우목사, 최옥순전도사) 교단 명칭은 “기독교대한감리회”로 하기로 하고 부수적인 것은 교단창립 준비위원회에 일임하다.
국제기독교연합회(ICCC)에 가입한 교단과 탈퇴한 교단으로 나뉘어 있다. 1962년 8월 감리교회의 자유주의 신신학을 배격한 17명의 교역자들은 마침 내한한 미국 자유감리교회의 스나이더 목사를 도와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에 한국예수교자유감리회를 창설했다. 이때 새로운 교리와 헌장을 제정하고 초대 감독으로 전덕성 목사를 추대하는 한편, 이듬해 8월 22일 ICCC에 가입했다.
그뒤 1964년 2회 정기총회를 열어 교단명을 예수교대한감리회로 바꾸고 대한예수교협의회(KCCC)의 창립에도 참여했으며,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해 1966년 웨슬레 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다 1967년 전덕성 목사에 대한 불신임안이 가결되어 박창재 목사를 새 감독으로 뽑았으나 1969년 그가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자 고병억 목사를 새로 추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병억 목사가 선출된 데 반발한 몇 사람이 따로 대한예수교감리회를 설립하고 곧 ICCC에서 탈퇴함으로써 예수교대한감리회는 2개의 교단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뒤 전통을 고수하는, 즉 ICCC에 가입한 예수교대한감리회는 1969년 9월 교단분열의 책임을 물어 고병억 목사를 사임하고 신신묵 목사를 새 감독으로 추대했다. 본부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3가동에 있으며, 산하기관으로 감리교신학교 등이 있다. 반면 새로 조직된, 즉 ICCC에서 탈퇴한 예수교대한감리회는 1970년 교리와 장정을 출판하고 그해 송은묵 목사를 새 감독으로 추대한 이래 감독이 여러 번 바뀌었다. 본부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상도동에 있으며, 산하기관으로 웨슬레 신학교, 교회문제연구소, 북한선교회 등이 있다.
미국에는 세계 그리스도의 교회 본부가 있는데, 이 교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을 주창하고 있으며, 성서만을 진리로 삼는다. 한국에서는 1935년 미국 본부의 체이스 선교사가 내한하여 최상현·성낙소 두 목사와 함께 서울에 2개의 교회를 세움으로써 활동을 시작했다.
1939년에는 힐 선교사가 내한하여 선교와 더불어 교육사업을 벌였으나, 1940년 일제에 의해 선교사가 추방되고 최상현 목사가 체포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8·15해방 후 기독교신학교를 세우고 남한 일대에 여러 교회를 세우는 등 다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61년 미국에서 최윤권(崔潤權) 목사가 귀국, 대한기독교통신대학을 개설하고 종교지 〈환원〉을 창간하는 등 교단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이에 반발한 세력이 1961년 재단법인 그리스도 교회복음회를 설립하면서 떨어져나갔다.
1965년에는 대한기독교신학교를 설립, 서울성서신학교와 통합하여 대한기독교대학교로 발전시켰으며, 1973년에는 소속 교회가 협의회로 확대 조직되었다. 1980년 태광출판사를 설립했으며, 2000년 현재 서울특별시 강서구 외발산동에 회관을 건립 중이다.
13) 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 (http://lck.or.kr/lck/main)
루터교회는 신약·구약성서를 신앙과 생활의 절대규범으로 믿으며, 사도신경·니케아신경·아타나시우스신경·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및 《루터 소교리문답서》를 교리로 여기는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한 교파를 말한다. 한국에 루터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32년(순조 32)으로, 독일인 선교사가 원산도(元山島)에 상륙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선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루터교 미주리의회에서 선교사 3명을 파견한 1958년 1월의 일이다. 이듬해 2월 서울 YMCA 회의실에서 첫 모임을 갖고, 같은 해 5월 처음으로 세례 및 입교식을 가졌으며, 역시 같은 해 11월 기독교방송 전파를 이용해 '루터란아워' 방송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선교사업에 들어갔다.
이후 한국의 루터교회는 1969년까지 한국루터교선교부로 있다가, 1971년 한국루터교선교회로, 1973년 한국루터교회로 각각 이름이 바뀌었다가, 1980년부터 기독교한국루터회로 부르게 되었다. 1960년 5월 기독교 통신강좌 보급 및 컨콜디아출판사를 통한 문서선교를 시작하였고, 1961년 3월부터는 월간 《새생명》을 발간하였다.
1972년 루터교세계연맹(LWF)에 가입해 국제 교류를 시작하였고, 같은 해 국제루터교협의회(ILC)에도 가입하였다. 1981년 6월에는 경기도 용인시에 루터신학대학교를 설립해 전도사업과 지도자 양성을 위한 기초를 확립하였다. 총회는 의회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산하에 컨콜디아사·기독교통신강좌부· 사회사업부·루터란아워방송(국제복음방송)·베델성서연구원·루터신학대학교· 북방선교위원회 등이 있다.
2002년 현재 서울·부산·대구·대전·천안·인천 등에 32개 지역교회가 있으며, 교인수는 5,000여 명, 교역자수는 36명이다. 총회 본부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신천동 7-20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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